[다산칼럼] 정치의 계절에 생각하는 조선 몰락의 교훈

입력 2024-02-06 17:55   수정 2024-02-07 00:14

조선이 망국의 운명을 맞은 1910년에 태어난 삼성그룹 창업자 고(故) 이병철 회장의 <호암자전>엔 일본 유학길에 부관(釜關)연락선에서 겪은 일화가 나온다. 뱃멀미가 심해 일등실로 옮기려는데 한 일본인 형사가 “조선인이 무슨 돈으로 일등실을 기웃거리느냐, 건방지다”고 모욕한 것이다. 그 일을 겪으면서 ‘우리나라는 어떤 일이 있어도 풍족하고 강한 독립국이 돼야 한다’고 느꼈고, 사업에만 몰두하게 된 것도 식민지 지배하 민족의 분노를 가슴 깊이 새기게 했던 그때의 사건 때문이라고 회고하고 있다.

조선의 몰락은 16~17세기 세상 변화와 18세기 산업혁명이라는 거대한 패러다임의 변화를 읽지 못했기 때문이다. 글만 읽다가 과거에 급제해 관직에 진출한 관료들은 명분만 중시하고 현실 감각이 부족했다. 도학 정치를 추구하는 사림의 등장 이후 부국강병책은 패도정치로 매도됐다. 시대착오적 숭명반청 사상으로 강희-옹정-건륭제로 이어지는 150년간의 당대 최고 청나라 문명을 거부했다. 서구가 산업혁명으로 도약할 때 조선은 세도정치와 삼정문란으로 침체되고 정체되면서 스스로 무너졌다.

발전하는 사회와 조직은 꿈이 있고 미래지향적이어야 한다. 미래지향적이 되기 위해선 사회에 믿음과 신뢰가 있어야 한다. 법치주의와 공권력이 도전받지 못하도록 사회 정의가 확립돼야 한다. 미래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대응에 실패한 국가와 기업은 예외 없이 2류, 3류로 전락했다.

국가의 역할은 비약하려는 개인이 가진 능력을 모두 펼칠 수 있도록 기반을 제공하는 것이다. 장기적인 비전을 갖고 일관된 정책으로 이를 뒷받침할 수 있어야 한다. 능력 있는 인재를 중용하고 유능한 전문가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번영하는 사회가 된다. 목소리만 큰 비전문가나 여론에 지나치게 의존해서도 안 된다. 정치는 여론에 의해 움직일지 모르지만, 국가와 사회는 여론에 의해 발전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4월 총선을 앞두고 정치의 계절이 본격화했다. 중대재해처벌법 유예 같은 절박한 중요 사안은 다수당의 반대로 해결하지 못하면서 경쟁적으로 대형 정책 공약을 발표하고 있다. 문제는 문재인 정권 시절 심각한 후유증을 남긴 소득주도성장처럼 충분한 검토와 정교한 각론 없이 급조된 것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천문학적인 소요 예산을 마련할 재원 대책도 없다. 지난해 세수 결손 규모는 역대 최대인 54조4000억원이다.

모든 사안은 추상적 문제가 아니라 구체적 과제다. 공동체가 유지 발전할 수 있는 튼튼한 법적·제도적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일부에만 편익을 제공하는 ‘입법의 지배’ 현상이 계속되면 법의 지배라는 기반을 잠식하고 번영의 기초를 무너뜨린다. 정치는 결과에 의해 평가받는 것이지 의도는 중요치 않다. “이로운 것 하나를 시작하기보다 그 전부터 있던 해로운 것 하나를 제거하는 것이 좋다”(야율초재)는 말이 요즘처럼 실감 난 적이 있을까.

일본 도쿄 아오야마공원묘지에 갑신정변을 주도한 김옥균의 묘가 있다. 낡은 틀을 깨려 한 젊은 개화파는 갑신정변 실패 이후 모조리 죽임을 당하거나 해외로 도피했다. 그 결과 망국 직전 고종 내각(1908년)에는 무기력한 늙은 대신 일색이었다. 조선은 그렇게 망해갔다. 2026년은 근대화의 시발점이 된 개항 150주년이다. 안보 환경의 급변으로 구한말과 비슷한 지정학적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데 정치권은 정쟁의 소용돌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효율적인 국가 운영 시스템을 갖추고 그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는 곳이 선진사회다. 산업화 시대의 역동적인 기운이 사라지고 기업을 옥죄는 각종 규제는 여전하다. 이병철 회장이 “일하는 자에게는, 일하지 않는 자가 가장 가혹한 비판자 노릇을 하는지도 모른다”고 통탄한 것처럼 과도한 반기업 정서가 팽배한 우리는 폐쇄적이고 교조적인 도덕정치 시대로 회귀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조선 망국의 역사에서 무엇을 배웠는가. 시대 변화를 읽고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행동할 때 미래가 함께한다. 과거에 발목 잡혀 한 걸음도 전진하지 못하는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현재가 과거와 싸우면 미래를 잃는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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