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쪽 팔다리 마비된 피아니스트 "왼손으로 치면 돼요" [이생망 리포트]

입력 2024-02-15 12:00   수정 2024-02-15 15:14


양손을 자유자재로 움직이지 못해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연주를 하는 피아니스트가 있다. 왼손 피아니스트 이훈 씨다.

초등학교 입학 전 피아노 교습소에서 나는 피아노 소리에 푹 빠져 음악인의 길을 걷게 된 이훈 씨(52)는 목표를 세우면 늘 실행하기 바쁜 사람이었다. 독일, 네덜란드에서 유학하며 음악의 깊이를 쌓았고, 세계적인 음악인이 되겠다는 꿈으로 부풀어 있었다.

미국 신시내티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논문을 쓰고 있던 어느 날 이 씨는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좌뇌가 60% 가까이 손상되면서 오른쪽 팔다리가 마비됐다. 실어증에 걸려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음악 한길을 걷던 이 씨에게 사고는 불현듯 찾아왔다. 그는 "음악인이라는 정체성을 도둑맞은 것 같았다"고 표현했다.

이 씨는 곁에서 자신을 지극정성으로 도와준 가족, 친구, 지인들 덕분에 절망을 딛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사고 이후 그가 다시 피아노 앞에 앉은 건 대수술 이후 반년 좀 지나서였다. 어릴 적 은사님이 그에게 "왼손으로 칠 수 있는 곡이 1000곡이 넘는다"라고 해준 덕분에 용기를 냈다고 했다. 위로가 아니라 확신의 말이었다고 그는 회상했다.

이 씨는 이후 매일 아침 피아노 음계를 반복해서 연습했고 연주곡을 연습했다. 뇌졸중으로 쓰러진 지 4년만인 2016년 서울 가톨릭대학교 성모병원 로비에서 첫 독주회를 열었다. 2020년 롯데콘서트홀에서 진행한 ‘My Left Hand’ 독주회, 포스코 재단 초청 의료진 감사음악회, 2021 예술의전당 인춘홀에서 ‘이훈 피아노 독주회’ 등 활발히 활동 중이다. 그는 "언젠가는 오른손으로도 자유롭게 연주하는 날이 올 거라 믿는다"고 말했다.



▶자기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왼손 피아니스트' 이훈(52)입니다. 초등학교 입학 전 동네 문방구 앞에서 놀다가 우연히 들은 피아노 소리에 푹 빠져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선화예술학교에 진학했고 선화예고 2학년 재학 중 독일문화원 장학생으로 뽑혀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독일 함부르크 국립음대,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국립예술대학을 졸업했습니다. 독일의 한 콘서바토리에서 강사로 활동하다가 2008년 미국 신시내티대학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했습니다. 논문을 쓰던 중 2012년 여름 불의의 사고로 학업을 다 마치지 못하고 귀국해야 했습니다."

▶사고가 일어난 그날의 기억이 있나요?
"날짜까지 정확하게 기억납니다. 2012년 8월 16일 저녁 7시였습니다. 당시 독일 할머니의 2층짜리 집에 세 들어 살고 있었습니다. 여느 때처럼 저녁 식사 준비를 위해 냉장고에서 재료를 꺼내던 중이었습니다. 냉장고 문을 여는데 순간 피가 머리로 쏠렸고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어지럼증이 느껴졌습니다. 문을 잡고 쓰러졌습니다.

평소 할머니는 저녁 7시가 지나면 자기 방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가곤 했는데 그날은 저녁 7시가 되도록 1층에 있었습니다. 그날따라 잠이 오지 않아서 텔레비전 앞에 계셨었습니다. 쿵 소리가 나서 할머니가 퍼뜩 달려와서 보니 제가 이미 쓰러져 있더라는 겁니다. 할머니는 놀란 마음을 추스르고 구급차를 불렀습니다. 할머니가 없었으면 세상에 없는 사람이 됐을 것입니다."

▶사고 전까지 아무런 증상이 없었나요?
"네, 사고는 예고 없이 찾아왔습니다. 뇌혈관 중 어디가 막혔던 것 같은데, 그렇게 되기까지 어떤 증상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사고 이후 이훈 님의 삶은 어떻게 바뀌었나요?
뇌졸중으로 쓰러져 좌뇌를 들어내는 대수술을 했습니다. 왼쪽 뇌의 60%가 손상되고 오른쪽 반신 마비는 물론 언어 장애까지 오고 말았습니다. 오른쪽 팔다리를 쓰지 못하는 것은 피아니스트로인 제게는 너무나 치명적인 장애였습니다.

▶억울한 마음이 들지는 않았나요?
당연히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컸습니다. 열흘 만에 의식을 찾았다고 하더라고요. 가족, 후배들 얼굴은 알아보겠는데 목구멍에서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몸을 제 마음대로 가누기도 어려웠습니다. 장애 때문에 피아노를 다시는 못 칠 거라는 생각에 절망스러웠습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살아난 것으로도 천만다행이더라고요. 반신불수가 된 제 곁에서 도움을 베풀던 가족들과 친구들을 보면서 사는 게 감사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태어난다는 마음으로 처음부터 모든 걸 다시 시작해보기로 했습니다. 미국 신시내티대학병원에서 재활 치료를 시작했고, 4달이 지난 2012년 12월에 귀국했습니다. 집 근처 서울 가톨릭대학교 성모병원에서 강도 높은 재활을 시작했고, 블록을 집어 틀에 끼워 넣는 연습과 손의 감각을 키우기 위한 치료를 이어갔습니다.

▶피아노 앞에 다시 앉기로 결심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은사님의 권유 덕분이었습니다. 귀국 후 선화예술학교 시절 지도해주신 전영혜 선생님(경희대 명예교수)을 다시 만났습니다.

은사님의 한 마디가 저를 다시 피아노 앞으로 이끌었습니다.

“세상에 피아노를 잘 치는, 좋은 연주자는 참 많다. 그런데 왼손 피아니스트는 손에 꼽을 만큼 적다. 왼손을 위한 연주곡은 1000곡이 넘는다. 넌 할 수 있다. 해 보자 훈아.”

치료 중에 다시 피아노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는데 마침 교수님의 응원을 받으며 용기를 낼 수 있었습니다.

▶무작정 한 손으로 연주를 시작해보니까 어땠나요?
움직임이 더디고 느려서 답답했어요. 전에는 쉽게 하던 것들을 이제는 몇백 번 더 연습해야 가능한 상태였으니깐요.

악보 암기도 제게는 큰 산이었어요. 뇌졸중으로 고등학생 때부터 써 온 영어를 다 까먹었어요. 음악인 중에 피아니스트만 유일하게 악보를 다 외워서 무대에 서거든요. 긴 악보를 머리에 넣는 것도 큰일이 되었죠.

▶양손 연주와 한 손 연주는 어떻게 다른가요?
원래는 왼손으로 반주하고, 오른손으로는 멜로디를 쳐요. 왼손으로만 치면 반주와 멜로디를 동시에 연주해야 해요. 매일 연습하는데도 아직도 적응이 안 됩니다.

더 큰 애로사항은 페달입니다. 왼쪽 팔과 다리를 동시에 쓰니까 균형 잡기 쉽지 않아요. 오른쪽 다리 힘을 키워서 오른발로 페달을 자유롭게 밟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사고 이후 처음으로 다시 공연을 한 날은 어땠나요?
수술받은 지 4년만인 2016년에 서울성모병원 로비에서 첫 연주회를 진행했습니다.
이성을 담당하는 기관인 왼쪽 뇌가 손실되니까 역설적으로 감성이 풍부해졌어요.
전에는 현란한 테크닉, 연습 효율을 많이 따졌어요.

“어떻게 하면 멋지게 연주해서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 고민했다면 이제는 “어떻게 하면 감동을 줄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됐어요. 그날 연주를 들은 아는 피아니스트가 제게 음악이 정말 많이 달라졌다고 말하더라고요.

더 놀라운 일은 신시내티 음대에서 박사과정을 지도하던 교수님이 그날 연주회에 있었던 거예요. 논문을 제출하지 못해 박사학위를 받지 못한 제 사정을 아셨던 교수님은 제게 7번의 연주회를 마치면 박사 학위를 수여하겠다는 제안을 했습니다.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저는 미국으로 떠났고, 2017년 8월 신시내티대학에서 음악 박사학위를 수여 받았습니다.

▶장애를 딛고 음악을 다시 하면서 이훈 님이 음악을 대하는 마음은 어떻게 달라졌나요?
오히려 피아노 치기에는 더 좋죠. 음악을 통해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는 게 뭔지 더 알게 됐다고도 할 수 있어요. 저는 연주자였지만 동시에 타인에게 위로받고 또 마음을 나눠 주는 친구가 됐다고 생각해요. 왼손 피아니스트로서 다시 삶을 살아 내겠다는 결정이 준 선물이죠.

▶현재 열심히 활동하고 계세요. 어떤 음악 활동을 하고 계시는지 설명 부탁드립니다.
무대에 꾸준히 오르고 있어요. 지난달에 부산에서 독주회 했고, 다가오는 3월에 모두예술극장에서 또 공연이 있습니다.

사회적기업 '툴뮤직' 장애인 예술단 소속 아티스트로 연주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툴뮤직은 음악으로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경계를 허물기 위해 지원하는 단체입니다.

▶이훈 님의 향후 목표는?
매일 아침 눈 뜨자마자 오른손으로 스케일(음계) 연습을 합니다. 앞으로 몇십년은 더 연주 활동을 하고 싶어요. 언젠가는 오른손으로도 자유롭게 연주하는 날이 올 거라 믿어요.

살다 보면 절망과 좌절을 안기는 일이 찾아올 수도 있습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 부정적인 감정을 끌어 안고 다시 한발짝 나아가보기로 마음 먹으면 살아내지더라고요. 우리 모두 당당하고 멋지게 살 수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최해련 기자 haery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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