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개 층 중 5개 층이 수개월째 비어 있습니다.”
7일(현지시간) 찾은 미국 워싱턴DC 중심가 1750K 빌딩. 미래에셋그룹이 2015년 1억1500만달러(약 1525억원)를 투자해 인수한 12층짜리(연면적 2만㎡) 건물이다. 당시만 해도 빈 사무실이 거의 없었다. 이른바 ‘대관 로비의 거리’로 불리는 K스트리트의 한복판에 있기 때문이다. 백악관 바로 앞을 지나는 K스트리트는 글로벌 기업들이 대관 담당 사무실 후보지 1순위로 꼽는 곳이다.
잘나가던 이 빌딩도 팬데믹 이후 대세로 자리잡은 원격근무 후폭풍을 피해가지 못했다. 장기 입주 기업들이 하나둘 사무실을 줄이거나 폐쇄하면서 지금은 5개 층이 비었다. 공실이 절대 없던 메자닌층(1층과 2층 사이층)이 통째로 비었고 2층 일부 공간도 입주자를 찾지 못하고 있다. 5층과 6층, 10층 역시 아무도 쓰지 않고 있다. 이 건물 관리인은 “임차 문의만 올 뿐 대부분 조건이 맞지 않아 수개월째 5개 층이 빈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건물 맞은편에 있는 1801K빌딩(연면적 5만3000㎡)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미래에셋그룹이 2014년 4억4500만달러를 주고 산 빌딩으로 전체 12층 중 7층과 10층 두 개 층만 비어 있다. K스트리트와 바로 접해 있는 데다 미국 중앙은행(Fed)이 건물의 35%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Fed가 이르면 내년 말 본사 건물 신축을 마무리하면 대규모 공실이 불가피하다. 팬데믹으로 위축된 상권이 회복되지 못하면서 이 건물의 1층 입구 절반은 오랫동안 비어 있다.
메리츠자산운용이 지분 49%를 보유한 12층 건물(655 뉴욕 애비뉴)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K스트리트와 접해 있지만 1층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입주자를 구하지 못하고 있다. 워싱턴 부동산 중개회사인 원스트리트컴퍼니 관계자는 “도심 한복판에 있는 건물조차 임차인을 구하기 어려운 지경”이라며 “1층 입주 업체에 3개월 이상 임차료 무료 혜택을 줘도 문의가 없다”고 전했다.
상권 붕괴 현상은 수치로도 입증된다. 글로벌 종합 부동산 서비스 기업인 CBRE에 따르면 지난해 말 워싱턴에서 공실률이 가장 높은 지역은 조지타운(34.2%)이었다. 조지타운은 식당과 쇼핑가가 몰려 있는 곳이다. 이에 비해 주거 지역인 북부 매사추세츠 거리(NoMa)의 공실률은 13.4%로 가장 낮았다.
‘공실 지옥’ 현상은 점점 심해지고 있다. 워싱턴 평균 공실률은 2021년 말 18.4%에서 2022년 말 20.5%로 급등한 뒤 지난해 말 21.2%로 상승하는 등 매년 최고치를 찍고 있다. 상업용 부동산 전문 업체인 커머셜에지는 지난해 말 워싱턴 오피스 공실률이 17.9%로 1년간 4.2%포인트 오른 것으로 집계했다. 같은 기간 미국 전역 공실률 상승폭(1.8%포인트)의 3배에 가까웠다. 커머셜에지는 보고서를 통해 “워싱턴이 다른 지역보다 상업용 부동산 수익률이 떨어져 팬데믹 이전 대비 공실률 상승폭이 미국 평균보다 컸다”고 설명했다. 코로나19가 확산하기 전인 2020년 이전만 해도 워싱턴 사무실 공실률은 10% 안팎이었다.
공실률 상승으로 워싱턴을 비롯한 해외 상업용 부동산에 투자한 국내 금융사들도 손실을 볼 가능성이 크다. 도심보다 주변 지역 건물을 인수한 회사들의 타격이 클 전망이다. CBRE 분류 기준으로 워싱턴에서 가격 상위 7% 안에 드는 핵심 빌딩(트로피)의 공실률은 지난해 11.5%였지만 하위 7%(클래스C) 빌딩의 공실률은 25.4%였다.
CBRE는 보고서를 통해 “고급 건물의 공실률은 조금씩 내려가고 있지만 지역 평균 수준에 못 미치는 저급 빌딩의 공실률은 떨어지지 않고 있다”며 “상업용 부동산에서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심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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