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모 전 대통령실 인사비서관은 지난 6일 밤 “공천과 관련된 어떤 당의 결정도 존중하고 조건 없이 따르겠다”는 내용의 입장문을 냈다. 전날 “대통령은 누구도 특혜받지 않는 공정하고 투명한 시스템 공천을 당에 누차 당부한 바 있다”는 대통령실의 입장이 나온 직후다. 이 전 비서관은 당초 박진 전 외교부 장관과 함께 서울 강남을 지역에 공천을 신청했다. 대통령실의 메시지가 두 사람을 겨냥한 것이란 해석이 나왔다. 이 전 비서관의 입장문 후 비슷한 발표가 잇따를 것으로 예상했다. 1급 비서관 출신이 험지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했으니 전직 장·차관, 수석비서관들도 험지 출마 행렬에 동참할 것이란 기대였다. 그리고 이틀이 지났지만 아직 그런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다.
꽃길 걷겠다는 대통령 측근들
당장 박 전 장관부터 묵묵부답이다. 이뿐만 아니다. 권영세 전 통일부 장관, 조승환 전 해양수산부 장관, 추경호 전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등 지난 총선에서 국민의힘이 이긴 지역구를 고른 장관 출신들도 아무런 말이 없다.
대통령실 국정기획비서관을 지낸 박성훈 전 해수부 차관, 검찰 출신 박성근 전 국무총리비서실장, 대통령실 관리비서관 출신 김오진 전 국토교통부 차관 등 차관급, 강승규 전 시민사회수석, 임종득 전 국가안보실 2차장 등 전임 대통령실 수석들도 모두 텃밭에 공천을 신청한 채 침묵하고 있다.
다들 각자의 사정과 억울함을 토로한다. 일부는 원래 자신의 지역구였던 곳에 공천을 신청한 게 무슨 문제냐고 항변한다. 다른 누군가는 자신이 출마할 지역은 사실상 텃밭이 아니라 험지라고 주장한다. “중앙정부에서 일하느라 지역구 관리를 못해 오히려 손해를 봤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 대통령과 찍은 사진을 여기저기 뿌리고, 지역구 주민들에게 대통령 시계를 돌리던 이들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변신이다.
스스로 험지 찾아야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7일 공개된 KBS 특별대담에서 “공천에 대통령실의 후광은 작용할 수 없다”고 했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과는 총선 끝나고 보자고 했다”며 공천 과정에 개입할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한 위원장도 같은 날 비슷한 메시지를 냈다.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 나와 “저와 대통령이 신뢰 관계를 유지하는 이유는 생각이 다를 때 자기 생각을 강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사(私)가 들어가지 않은 공천을 해야 한다”며 “내가 그런 공천을 할 수 있는 가장 준비된 대표”라고 강조했다.
말만 들으면 너무도 건강한 당정관계다. 하지만 국민들은 판단을 유보하고 있다. 2주 전 불거졌던 ‘윤-한 갈등’이 워낙 강하게 뇌리에 박혀서다. 두 사람의 진정성을 판단할 첫 시험대가 바로 대통령 측근들의 공천이다. 이들이 어느 지역구에, 어떤 방식으로 공천을 받아 선거에 나갈지 국민이 지켜보고 있다.
이제 정권 초 국가와 국민을 위해, 윤석열 정권의 성공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한 장·차관, 대통령실 참모들이 대답해야 할 차례다. 험지에 나가 승리하면 자신의 정치적 체급도 올라가고 여권 전체에도 좋은 일이다. 적어도 대통령에게 부담을 주지는 말아야 하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