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경제사학자 리처드 이스털린은 돈과 행복의 관계를 연구하다가 일정한 패턴을 발견했다. 소득이 일정 수준을 넘어 기본 욕구가 충족되면 소득이 증가해도 행복도는 더 이상 증가하지 않더라는 것. 이른바 ‘이스털린의 역설’이다. 경제학 용어에 빗대면 ‘행복 체감의 법칙’쯤 되겠다.
특히 선진국에서 이런 현상은 두드러진다. 로버트 레인 미국 예일대 교수에 따르면 지난 50년간 미국의 평균 가계소득은 2배 정도 증가했지만, 미국인 중 ‘행복하다’고 답변한 사람은 1957년 53%에서 2000년에는 47%로 오히려 소폭 감소했다. 행복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한국은 뭔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셈이다. 하루 세끼 챙겨 먹기 버거운 아프리카 빈국도 아닌데 여전히 돈에 목을 매고 있는 한국. 정상이라고 보기 어렵다. 두 가지 요인(예를 들어 돈과 행복)이 영원히 ‘정비례’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을 스웨덴의 통계학자 한스 로슬링은 ‘직선 본능’이라고 정의했다. “토마토는 물을 주면 잘 자란다. 그렇다고 온종일 물을 틀어놓으면 다 썩는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한 번에 물 6리터 이상을 마시면 죽는다.”(저서 <팩트풀니스>에서)
‘돈=행복’이라는 왜곡된 인식은 정부 정책에도 반영된다. 저출산 대책이 대표적이다. 사고 회로의 수순은 대략 이렇다. ‘한국에서 아이를 키우는 데는 돈이 많이 든다→지금 젊은 세대는 취업난 등으로 부모 세대보다 물질적으로 여유가 없다→삶이 행복하지 않고 불안한데 누가 2세를 생각하겠나?→그러니 아이를 낳게 하려면 삶의 행복도를 높여야 하고 그러려면 돈을 쥐여줘야 한다.’ 지금까지 나온 저출산 대책이 온통 경제적 지원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건 이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는? 알다시피 별무신통이다. 출산율을 높이려면 바꿔야 할 게 돈 말고도 산더미라는 방증이 아닐는지.
돈은 상대적이다. 잣대는 타인이다. 주변 사람보다 생활 형편이 넉넉하다고 인식해야만, 만족감을 얻을 수 있다. 허나 21세기는 이런 만족감을 느끼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각종 SNS는 흉내 내기 어려운 타인의 윤택한 삶으로 가득 차 있다. 비교하는 순간 멀쩡하던 나의 삶은 불행의 언덕을 구른다. “이번 생은 망했구나.”
설날 연휴 첫날이다. 모처럼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인다. 보고 싶던 얼굴들이다. 행복이 멀리 있는 게 아니구나, 잠깐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서은국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의 통찰은 설날에 제격이다. “행복의 핵심을 한 장의 사진에 담는다면 어떤 모습일까? 그것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음식을 먹는 장면이다. 문명에 묻혀 살지만, 우리의 원시적인 뇌가 여전히 가장 흥분하며 즐거워하는 것은 바로 이 두 가지다. 음식, 그리고 사람.”(저서 <행복의 기원>에서)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본능은 이미 깨닫고 있다. 아시안컵 축구 경기도 친구들과 치맥을 곁들여야 더 재밌고, 허접한 B급 영화도 팝콘 먹으며 여럿이 둘러앉아 낄낄대야 스트레스가 풀린다는 것을. 1년에 한 번, 힘들게 마련된 행복의 장에서 동생이 몰고 온 벤츠는 가볍게 무시하자. 그리고 행복하자, 부러워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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