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법안 논의가 처음 시작됐을 때 공화당 측은 멕시코 국경을 통한 불법 이민자 단속이 우선이라며 난색을 보였다. 2020년 이후 월평균 20만 명의 불법 이민자 유입으로 미국 남서부 주들이 치르는 혼란이 조 바이든 행정부의 안이한 이민정책 탓이라고 비난했다. 결국 양당과 무소속 상원의원으로 구성된 3인 특별위원회의 부단한 노력으로 지난달 대외 원조와 국경 통제 강화를 통합한 1183억달러(약 157조원) 규모의 국가안보법안이 제출됐다. 이에 힘을 싣는 듯 한·중·일을 포함한 인도·태평양지역 9개국 주재 미국대사가 동맹국들의 신뢰 구축에 원조법안 통과가 긴요하다는 내용의 연서 서한을 이례적으로 미 의회 지도자들에게 보냈다.
그러나 정작 공화당은 국경 강화 계획이 흡족하지 못하다며 이 법안을 무산시키고 국토안전부 장관 탄핵동의안을 발의했다. 이 모두는 올 11월 대선에서 이민 문제를 선거 재료로 이용하려는 공화당 유력 후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국경 현안 타결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새 법안은 국경 강화 관련 항목이 빠진 채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 대만의 군사 지원, 우크라이나 재건, 무력 충돌지역 민간인에 대한 인도적 원조 등 총 950억달러(약 126조원) 규모로 줄었다.
트럼프는 우크라이나 원조에도 반대 입장이고, 재집권할 경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방위비를 부담하지 않는 회원국은 러시아의 공격에도 방치함은 물론 “러시아가 무슨 짓이든 마음대로 하라 하겠다”고까지 공언했다. 무책임하고 위험한 발언이지만 그의 지지자들에게는 통하는 어조다. 유력 일간지 월스트리트저널(WSJ)이 미등록 유권자 및 공화당 프라이머리 유권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올해 대선에서 우선시하는 14개 현안 중 대외정책은 최하위였다. 즉 미국 유권자들은 경제, 이민, 낙태, 인플레이션, 기후변화 등에 관한 후보들의 입장을 지지 여부 기준으로 삼겠다고 답했다.
지난해 10월 케빈 매카시 하원의장은 민주당과 협력해 정부 셧다운 회피 연방예산안을 통과시켰다는 이유로 당내 강경파의 비난 속에 사상 첫 중도 해임됐다. 후임인 마이크 존슨 의장도 원조법안을 상정하면 해임하겠다는 협박을 받고 있다. 매카시는 지난 연말 의원직을 사퇴했고, 최근까지 극단 정치에 대한 환멸 등을 이유로 정계를 떠나겠다고 밝힌 상·하원 의원은 40명가량에 이른다.
토론과 타협을 통한 민주주의의 본보기였던 미국 정치의 파행 앞에 동맹국은 희생자다. 피터 해서 킹스칼리지런던대 교수와 존 해플리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신간 <제국은 왜 멸망하는가>에서 글로벌 경제, 신흥 강국의 등장, 이민 등 오늘의 현상은 과거 로마제국 쇠락기 국제 환경과 유사하지만, 서방이 신흥 강국들을 수용하면서 서방의 핵심 이해를 수호하는 세계질서를 만들 시간은 아직도 남아 있다고 설파했다. 과연 미국의 정치가들에게 이 같은 비전이 있는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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