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살려조 으아앙."
퇴근해 집에서 쉬던 저녁 시간, 갑자기 무언가 와르르 쏟아지는 소리와 함께 딸아이의 다급한 외침이 들립니다. 소리가 나는 발코니로 달려갔더니 딸아이가 종이 상자 더미에 깔린 채 아빠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상자를 치우고 아이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크게 다치진 않은 것 같은데, 갑자기 상자가 쏟아져 깜짝 놀란 모양이었습니다.
놀란 마음을 다스리고 상황을 살펴봤습니다. 안방에서 놀던 딸아이가 창문 너머 발코니에 있는 세발 자전거를 봤고, 그곳에 앉아있고 싶어서 가다가 실수로 분리수거함을 치면서 쌓아뒀던 종이상자가 쏟아진 것 같았습니다.
날짜를 보니 일주일에 한 번 재활용 쓰레기를 내놓는 날이네요. 분리수거함 주변에 흐트러진 상자들을 보니 한 주 사이 재활용 쓰레기가 많이도 쌓였다 싶습니다. 나름 커다란 분리수거함을 쓰고 있지만, 아이가 크면서 쓰레기도 늘어가고 있습니다.
우는 아이를 달래 엄마에게 보내고는 고무장갑을 끼고 재활용 쓰레기를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매주 한 번 재활용 쓰레기를 내놓는 이 날을 놓치면 지금 흐트러진 쓰레기들과 일주일을 더 지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쓰레기를 수거하는 날 외에는 집 안에서 쓰레기를 보관해야 합니다. 집 안에 재활용 쓰레기를 그냥 쌓아두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렇기에 노후 아파트에 살면 '예쁜 분리수거함'을 찾게 됩니다. 온라인에서는 멋진 가구 느낌을 주는 분리수거함 제품이 고가에 판매되는가 하면, 분리수거함도 인테리어의 일부라는 글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현실은 어떨까요. 신혼 시기에는 나름대로 깔끔하고 큼직한 분리수거함을 마련하고 신경 써서 쓰레기를 버렸습니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나고 자라며 쓰레기도 점차 늘어났고, 이제는 분리수거함이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쓰레기를 버리는 날이 되면 분리수거함에서 넘친 쓰레기가 발코니 바닥을 나뒹굴고는 합니다. 더 큰 분리수거함을 찾기도 어렵습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마트에 가서 장을 볼 때 장바구니를 가져가지 않고 있습니다. 마트에서 주는 폐상자에 짐을 담아오고, 이후에는 분리수거함에 들어가지 못하는 재활용 쓰레기를 담아 버리는 용도로 쓰는 겁니다. 물건을 사고 커다란 비닐봉지를 받으면 그 안에 비닐류 쓰레기를 담습니다. 분리수거함에 모으는 것보다 부피를 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모은 쓰레기는 배출일에 꼭 버려야 합니다. 그 시간을 놓치면 한 주 동안 더 쌓아둬야 하니 말입니다. 간혹 배출일을 놓쳐 여름에 쓰레기를 2주 쌓아두면 벌레가 꼬이고 악취가 나기도 합니다. 결국 비가 오면 비를 맞으면서, 눈이 내리면 눈을 맞으면서 쓰레기를 정해진 시간에 버려야 합니다. 비바람이 부는 날이면 곳곳에서 쓰레기가 날아가는 모습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쓰레기장을 항상 설치해두고 버리면 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쓰레기장으로 지정된 공간 자체가 없는 노후 아파트에서는 쉽지 않습니다. 수거 차량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공간에 쓰레기장을 만들려면 지상 주차장을 일부 없애야 합니다. 쓰레기장 한 곳당 2~3개 주차면은 필요합니다.
1980년대 주택건설기준에 관한 규칙을 보면 전용 85㎡ 미만 아파트는 가구당 0.4대의 공간을 마련하도록 했습니다. 가뜩이나 부족한 주차장을 더 없앤다니 지자체 허가는커녕 주민 동의를 얻기도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만에 하나 설치하더라도 그 관리 책임은 경비원에게 돌아갈 것이 뻔합니다. 노후 아파트의 씁쓸한 단편입니다.
손에 집히는 대로 집 안, 또는 복도에 있는 쓰레기 투입구에 넣어버렸죠. 쓰레기 투입구는 아파트 지하부터 최상층까지 연결된 통로 형태로, 여기에 쓰레기를 넣고 뚜껑을 닫으면 지하 쓰레기 집하장으로 떨어져 모이게 됩니다.
버리는 과정 자체는 지금보다 편리했지만, 재활용품 분리가 어려워 그냥 소각되는 쓰레기가 많았습니다. 일정한 쓰레기 처리비를 내다보니 각 가정에서 쓰레기를 줄이려는 노력을 하지도 않았죠. 쓰레기 집하장과 가까운 1층 가구는 악취와 벌레에 시달리기도 했습니다.
물론 지금에 와서는 노후 아파트의 특징이 되어버린 '의문의 반지하 공간'이 되어 버였습니다. 간혹 빈 공간을 드나드는 고양이나 족제비로 인해 옛 쓰레기 집하장이 야생동물의 보금자리가 됐구나 생각하기도 합니다. 사람과 함께한 아파트의 30여년 세월은 점차 흔적으로만 남고 있습니다.
오세성 한경닷컴 기자 sesung@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