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후 그 기업인, 공사를 대동하고 부촌으로 유명한 다케야초의 한 건물을 방문한다. 7934㎡(약 2400평)의 대지에 유럽식 2층 건물, 덴마크 공사관 관저였다. 이 정도면 어떠냐고 물었다. 입이 딱 벌어진 공사, 뭐라고 평가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 기업인은 당시 돈으로 4200만엔을 주고 그 건물을 매입했고 공사관은 바로 이사했다. 월세는 어떻게 하면 되냐는 말에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게 10년을 무상으로 사용하다가 1962년 8월 15일, 광복절 선물로 한국 정부에 기증된 그 건물이 지금의 대한민국 일본대사관이다.
서갑호, 먹고 살기 힘들어 14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막노동에서 시작해 온갖 거친 일을 거쳐 방직산업으로 성공했고 한때 서일본에서 소득세 1위까지 했던 분이다. 1915년에 경남 울주군에서 태어났는데 신격호 회장의 옆 동네였고 ‘도쿄의 신격호, 오사카의 서갑호’로 불리며 의형제로 지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동네, 뭔가 있는 것 같다.
한국인이 가장 많이 거주하던 오사카의 공사관도 동포들의 성금으로 운영비를 내다가 1963년에 와서 사달이 났다.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공사관을 옮겨야 하는데 보증금 2700만엔을 마련할 방도가 없었다. 또 나섰다. 현재 가치로 300억원에 달하는 보증금을 서갑호, 한록춘, 안재호 등 오사카의 다섯 동포가 부담했다.
그래 놓고도 월세 신세가 안타까웠는지 7년 뒤에는 아예 땅을 사고 건물을 지어 공사관을 옮기자는 결의를 한다. 그래도 염치가 있었는지 외교부는 굳이 비싼 곳에 지을 필요는 없다고 했다. 동포들은 그건 우리가 쪽 팔려서 안된다고 말하며 도심 한복판인 신사이바시의 대지를 매입한다. 그런데 땅 주인이 구매자가 한국인이라는 걸 알고 팔지 않겠다고 몽니를 부렸다. 결국 한록춘 씨의 일본인 부인 명의로 매입했다. 1974년 지상 9층, 지하 2층 건물을 완공했고 그 즉시 한국 정부에 소유권을 이전했다. 교포들이 설계, 부지 매입, 공사 비용으로 당시 돈 8억엔을 전액 기부한 최초의 사례다.
설마 벌써 감동이 오는가? 아직 멀었다. 지금 일본에 존재하는 외교공관 10개 중 9개가 재일동포들이 땅을 사고 건물을 올려 조국에 기증한 것이다. 그 부동산, 현재 가치로 2조원을 훌쩍 넘는다고 하니 세상에 이런 동포들이 또 존재할까? 독하다는 유대인들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결정되자 다시 나선다. 그때 돈으로 100억엔의 성금을 모아서 기증했고 올림픽공원에 있는 경기장, 올림픽파크텔, 올림픽회관 신축 비용, 미사리 조정경기장과 장충체육관의 보수 비용으로 집행됐다. 서울의 66㎡(약 20평) 아파트가 2000만원 하던 시절에 541억원이었다. 당시에 일본을 제외한 전 세계 동포들이 모은 성금이 총 6억원이었으니 비교가 된다.
지독한 차별 아래 힘들게 사는 자신들이 쪽팔리는 건 견딜 수 있어도 조국이 국제무대에서 부끄러우면 안 된다는 결기였다. 서갑호, 망해가던 방림방적을 인수해 한국의 방직업을 선진화했다. 구미에 대규모 공장을 추가 완공했는데 불의의 화재로 전소됐다. 그때 1차 오일쇼크의 불운이 겹치고 또 하필 그 순간에 일본 은행들이 대출금을 일시에 회수하면서 부도로 무너졌다. 그 과정에 석연찮은 부분이 많았지만, 고국의 정부는 어떤 도움도 주지 않았다. 오히려 그 시점에 모국에 유학을 온 재일동포 학생들을 간첩으로 조작하며 공안정국을 조성했고 국민들이 재일동포들을 백안시하게 했다. 이젠 그 누구도 서갑호를 기억해주지 않지만 도쿄 대사관 지하의 작은 기념관만이 그가 그곳에 존재했고, 조국을 너무나도 짝사랑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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