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화 가치가 떨어지는 '엔저 현상'이 장기화하자, 일본 내에서 한국인 등 외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이중가격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몰리는 관광객으로 인해 치솟은 물가가 현지인들의 가계에 부담을 주고 있다는 지적이다.
26일 외신을 종합하면 나가야마 히스노리 일본 료칸 협회 부회장은 최근 현지 매체 '트래블저널'에 기고한 글에서 "싱가포르에서는 테마파크나 슈퍼마켓, 레스토랑 등에서 거주자에게 할인 혜택을 주는 방법으로 이중가격제를 운용한다"면서 이중가격제를 소개했다.
이중가격제는 같은 상품이라도 외국인에게 더 비싼 값을 받는 가격 정책을 말한다. 일본에서 내국인임을 증명하면 숙박업소, 음식점, 관광지 등에서 할인을 해주는 방식이다.
나가야마 부회장은 "이중가격을 받더라도 외국인 관광객은 빠른 입장 등 우대를 느낄 수 있으니, 돈을 더 지불하는 게 나쁘게만 비치진 않는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도 최근 사설을 통해 "외국인 가격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면서 "JR 철도 할인 등 일본의 관광·운수업은 지금까지 물가가 높은 나라의 '대접'으로 ‘외국인에게는 '할인'을 기본으로 했지만, 환경이 바뀐 지금, 발상을 전환하고 싶다"고 이중가격제 도입 논의에 불을 붙였다.
일각에서는 이중가격제는 자칫 '외국인 관광객 차별' 논란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3·1절 연휴 일본 여행을 계획 중이라는 이모(33·남)씨는 "엔화가 싸니까 일본에 가는 거지, 일본에 안 가면 안 돼서 가는 게 아니다"라며 "다른 선택지는 얼마든지 존재한다"고 불편한 심기를 나타냈다.
부작용이 우려되는 상황이지만, 일본에서는 이미 이중가격제가 현실화하고 있다. 일본 전철 운영사 JR 그룹은 최근 외국인 관광객에게 판매하는 JK철도패스 7일권 가격을 2만9650엔에서 5만엔으로 무려 69%나 올렸다. 급락한 엔화 가치를 보완하기 위한 조처라고 해도, 관광객들의 고개는 갸우뚱해질 수밖에 없다는 평가다.
그런데도 일본은 왜 이런 논의를 시작하는 걸까. 일본 관광청에 따르면 지난 1월 일본을 방문한 관광객 수는 268만810명으로, 전년 동월 대비 79.5% 폭증했다. 이는 엔저 장기화에 따른 것으로 관광업계는 풀이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엔화가 쌀 때 여행을 가자는 심리"라고 했다.
하지만 유명 관광지에 거주하지만, 비(非)관광업에 종사하는 현지인들의 표정은 어둡다. 외국인 관광객이 많이 찾는 곳일수록 물가가 높아지는데, 현지인들의 임금 상승률이 물가 상승률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진단이다.
미국 경제 전문지 블룸버그통신은 "엔화 약세로 일본이 저렴한 여행지로 변했지만, 현지 임금은 폭등하는 물가를 따라잡기 힘든 상황"이라고 짚었다.
홍민성 한경닷컴 기자 msho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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