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단기술이 세상을 얼마나 요란하게 바꾸든 모든 것은 컴퓨팅에서 시작한다. 노트북과 스마트폰, 대용량 서버의 기본적 작동 원리는 동일하다. 컴퓨터는 중앙처리장치로 불리는 CPU(스마트폰은 모바일AP)와 메모리 반도체로 작동한다. 우리가 컴퓨터에 어떤 동작을 하라고 명령하면 CPU가 연산 방식, 메모리 접근, 입력과 출력을 결정한다. 이렇게 생성된 정보와 데이터는 D램과 낸드플래시로 넘어가 저장된다. 인공지능(AI)이 등장하기 전 CPU와 메모리 시장의 최강자 인텔과 삼성전자가 세계 반도체 시장을 양분한 배경이다.
비즈니스 세계에서 위기는 기회로, 기회는 위기로 순식간에 바뀐다. 미국이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저지하기 위해 공급망 전쟁에 나설 때만 해도 “삼성에 운이 따른다”는 평가가 많았다. 중국의 추격 속도 둔화가 삼성에 반사이익을 안겨줄 것이라는 관측이었다. 하지만 서서히 드러나는 공급망 전쟁의 진실은 미국의 반도체 굴기다. 4년간 520억달러의 보조금을 걸었더니 세계 600여 개 기업이 미국 진출을 선언했다. 여기에 엔비디아와 마이크로소프트(MS)를 양대 축으로 한 AI산업 발진이 기존 반도체 생태계를 급속도로 빨아들이고 있다.
AI 시대의 컴퓨팅은 선수 교체를 요구한다. CPU 자리에 GPU(그래픽처리카드), D램 자리에 HBM(D램을 여러 겹으로 쌓아 올린 고용량 메모리)이 투입된다. 삼성전자는 CPU도, GPU도 없다. 칩 설계도 제자리걸음이다. HBM은 SK하이닉스에 선수를 빼앗겼다. 엔비디아를 놓친 뒤 AMD를 겨우 끌어들였지만 미국 마이크론테크놀로지가 등 뒤에 바짝 붙었다. HBM이 AI 반도체의 핵심으로 떠오르자 삼성의 오랜 고객인 애플 구글 테슬라 퀄컴 넷플릭스 아마존 등은 기존 메모리 주문을 줄이기 시작했다. AI 시대 개막에 들뜬 반도체 특수 기대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있다.
시스템반도체 사업 환경은 더 나빠지고 있다. 미국이 공급망 파트너로 끌어들인 일본과 대만이 삼성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확장을 강력 저지하면서다. 인텔이 “MS와 손잡고 올해 말까지 1.8나노(㎚) 칩 양산에 나서겠다”고 공언한 것은 GPU에 내준 CPU 실지(失地)를 파운드리로 만회하겠다는 고심의 발로다. TSMC조차 3나노에 머무는 상황에서 허풍을 떤다는 촌평이 만만치 않았지만 비슷한 시기 “미국 정부가 인텔에 100억달러의 보조금을 지원할 것”이라는 보도에 비춰볼 때 미국판 반도체 굴기가 어떤 양상으로 전개될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더욱이 인텔은 난공불락 TSMC는 놔두고 삼성을 콕 지목해 선전포고를 날렸다. 일본의 반(反)삼성 기치는 더 노골적이다. 일본 정부가 TSMC에 4조원대 보조금을 지급하면서 착공한 구마모토 공장은 파운드리를 주력으로 삼았다. TSMC의 합작 파트너가 소니인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과거 삼성에 전자산업 맹주 자리를 내준 소니는 현재 삼성의 숙적, 애플의 아이폰 이미지센서 전량을 독점하고 있다. 수조원대 보조금을 발판으로 도요타 소니 소프트뱅크 등이 출자해 세운 라피더스도 홋카이도에 파운드리 공장을 짓는다. 삼성 고객사는 여전히 퀄컴, 테슬라 정도에 머물고 있는데 갑자기 사방을 둘러싼 적군들이 그 물량마저 내놓으라고 위협하는 형국이다.
미국 주도의 공급망 전쟁은 반중국 전선을 이탈했다. 기존 경쟁 구도는 완전히 포맷됐다. 결코 평화롭게 끝날 전쟁이 아니다. 유럽까지 참전하면 반도체판 ‘제3차 세계대전’이 터진다. 독일은 TSMC를, 아일랜드는 인텔을 이미 끌어들였다. 중국도 가만 앉아서 죽지는 않을 터. 유혈 낭자한 전투와 포연 자욱한 교전이 끝나면 생사를 가른 새로운 질서가 태동할 것이다. 무엇보다 삼성전자의 대분발이 긴요하다. 과거 소니, 애플을 제치고 따라잡던 야성을 회복해야 한다. 동시에 승자독식, 보조금 살포가 횡행하는 국가대항전에 기업들만 외롭게 놔둬서는 안 된다. 정부와 업계가 머리를 맞대 모든 상황을 촘촘하게 점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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