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과학기술정책을 혁신해야 나라가 산다

입력 2024-02-28 18:02   수정 2024-02-29 00:30

인류는 격변(disruptive change)의 시대에 들어섰다. 변화의 추동력은 과학기술이다. 대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선 과학기술정책을 혁신할 필요가 크다. 그 구체적인 방법을 논의해보자.

첫째, 국가 전략과 과학기술정책의 연계성이 심각하게 낮다. 정부는 12개 분야의 국가전략기술을 지정하고 그 아래 50여 개 세부 분야를 제시했는데, 그저 도식적인 분류에 불과하다. 미래에 어떤 분야가 유망해 과학기술적 성과를 얻고, 더 나아가 먹거리가 된다는 것은 여전히 질문이지 답이 아니다. 비유하자면 등산하려고 하는데 에베레스트산으로 가는지 남산으로 가는지를 결정하지 못한 것이다.

우주항공산업은 조립에 기반한 발사체 역량이기도 하지만 초소형 인공위성 기반 인터넷 서비스이기도 하다. 즉, 우리 시대의 전략은 판단의 영역이 아니라 상상력과 창의 그리고 집념의 영역에 있다. 이 영역의 주체와 그 주체가 제대로 일할 수 있는 제도를 우리는 만들지 못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20여 년 전부터 RAHS(Risk Assessment and Horizon Scanning)를 수립해 과학기술정책을 마련하는 데 활용했다. RAHS는 인공지능(AI)에 기반해 빅데이터를 처리한 데이터를 정책 수요자에게 제공하고 그들의 토론과 공론을 유도한다. 반면 한국 정부에는 기존 분과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전략적 결정을 내리는 것을 가능케 하는 빅데이터, 이를 처리해 정제하는 알고리즘, 또 이를 알아보는 인재들이 토론해 정책을 도출해 본 경험이 전무하다. RAHS와 같은 인프라 없이는 어떠한 모색도 헛된 투자에 불과할 것이다.

둘째, 연구개발(R&D) 과정을 훨씬 투명하고 유연하게 관리해야 한다. 우선 투명성이 너무 떨어진다. 수백 쪽에 달하는 어려운 내용의 계획서를 소수의 이른바 전문가가 채점기준표에 따라 점수를 부여해 몇 시간 만에 평가한다. 초등학교 산수시험 채점 방식과 동일하다. 왜 그렇게 판단했는지 정돈된 과학적인 근거가 없다. 과제 선정 과정이 불투명하니 지원한 연구자의 입장은 매우 혼란스럽다. 떨어진 이유를 본인이 납득하면 그 자체로 좋은 학습이 될 텐데 그런 기회도 없다.

R&D 선정의 불투명성은 소위 ‘R&D 카르텔’이라는 오명을 빚어낸 가장 큰 원인이기도 하다. 지금보다 수십 배의 자원을 투자해 선정 과정에서 합리적인 토론과 피드백이 가능하게 해야 한다. 선정위원과 계획서 제출자, 그 과정을 지켜보는 주변의 연구자들이 치열하게 학습하고 재학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셋째, R&D 행정 부담을 완전히 없애야 한다. 지금도 유명 대학, 유수 연구소의 수많은 연구원이 종이 영수증을 A4 용지에 붙이고 참석한 분들의 사인을 받으러 뛰어다니고 있다. 한 사람이 일탈하면 수천 명의 정직한 연구자를 고통스럽게 하는 구시대적 규제가 깊숙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예산총액 내에서 연구자가 자유롭고 유연하고 탄력적으로 연구할 수 있어야 환경 격변에도 대응할 수 있는 것이다.

넷째, ‘위험 소통’을 강화해 국민의 과학기술 수용성을 높여야 한다. 아직도 미국산 소고기의 망령과 유전자 논문 조작 사건의 트라우마가 과학기술계를 덮고 있다. 선진국에서 편안하게 실시되는 많은 기초연구와 실험, 임상, 개발이 법률상 불가능하다. 이에 대해 호소하거나 논박해도 ‘사고가 나면 당신이 책임질 거냐’는 방관자적 반응만 나온다. 리스크를 보다 솔직하게 국민에게 알리고 또 그 관리와 대응 계획을 투명하게 공개해 국민에게서 다양한 아이디어를 얻어야 한다. 국민이 어리석어서 저러고 있다는 방식으로 접근해서는 아무것도 이뤄낼 수 없다.

마지막으로 정책가 본인들이 혁신해야 한다. 현대 과학기술이 다양한 학문 분야와 융합하고 연결되는 특성을 떠올린다면 기존의 관료제 타성과 부처이기주의에 머물러선 국가 과학기술정책을 이끌 수는 없다. 정부가 스스로 뼈를 깎는 노력으로 탁월한 전문가를 겸손한 자세로 영입하고, 객관적인 데이터와 증거에 기반한 정책 결정을 해야 한다.

전략기술을 활용해 세상에 내보이는 주체는 국민과 기업이다. 혁신의 주체와 활용의 결정자 역시 마찬가지다. 정부의 과학기술정책가들이 주체가 된다고 착각하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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