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반도체 랠리 속 유독 부진한 삼성전자 주가에 주주들의 한숨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최근호실적을 낸 AI 대표주 엔비디아가 날아오르며 반도체 2등주 SK하이닉스가 사상 최고가를 썼고, 한미반도체는 지난달 44.46% 상승했는데요. 명실상부 국내 반도체 대장주 삼성전자 주가는 지난달 0.01% 오르는 데 그쳤습니다.
주가의 향방을 가른 건 고대역폭메모리(HBM)입니다. 엔비디아가 고성능 메모리 반도체인 HBM를 사들이면서 HBM 시장 1위인 SK하이닉스가 엔비디아 수혜주가 된 거죠.
최근 시장 3위인 마이크론이 앞으로 엔비디아에 신제품인 HBM3E를 납품한다고 밝히며 HBM 시장 경쟁은 격화될 전망입니다. SK하이닉스가 1위 자리를 지킬 수 있을지, 명실상부 글로벌 D램 1위 기업이지만 HBM 후발주자가 된 삼성전자는 반전에 성공할 수 있을지, 혹은 마이크론의 공세에 밀릴 것인지 여러 전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AI 가속기는 대용량 데이터 학습 및 추론에 특화된 반도체 패키지입니다. 패키지란 반도체 여러개를 모아붙여서 전자기기에 넣을 수 있게 조립한 제품이고요. 여기에 들어가는 핵심 부품이 HBM입니다.
우선 반도체는 시스템 반도체와 메모리 반도체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우리 뇌에서도 숫자를 계산하는 부분이 있고, 정보를 기억하는 부분이 있잖아요. 시스템 반도체는 연산하는 역할을 하고요, 메모리 반도체는 저장하는 역할을 합니다.
컴퓨터 사양을 결정하는 중앙처리장치(CPU)와 최근 AI용으로 떠오른 그래픽처리장치(GPU) 등이 시스템 반도체고요. D램, 낸드플래시 등은 메모리 반도체입니다.
AI한테 방대한 정보를 학습시키려면 시스템과 메모리 반도체 모두 고성능이어야 합니다. 대용량 데이터를 저장하려면 D램 한 개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D램을 그냥 이어붙이면 면적이 늘어나지요. 초소형 부품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D램을 수직으로 쌓아 데이터 용량을 크게 늘린 제품이 HBM입니다. 수많은 정보를 빠르게 유기적으로 처리해야 하는 생성형 AI, 데이터센터, 슈퍼컴퓨터 같은 차세대 산업에 맞춤형 제품이죠. 엔비디아의 AI 가속기에는 GPU랑 HBM이 들어가는데요, GPU는 자사 제품을 쓰고 HBM은 사옵니다.
HBM은 최근 글로벌 반도체 시장의 가장 큰 화두입니다. 엔비디아, 암(ARM) 등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의 HBM 수요가 급증하면서 가격이 치솟고 있습니다. 현재 HBM 가격은 일반 D램 대비 대여섯 배 수준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시장조사업체 욜그룹에 따르면 지난해 HBM 시장 규모는 54억달러(약 7조원)로 추산되는데요. 올해 141억달러, 약 3배로 커질 전망입니다. 2029년에는 380억달러(약 50조원) 규모가 될 것으로 예측됩니다.
이 HBM을 세계 최초로 만든 회사가 SK하이닉스입니다. 약 11년 전인 2013년에 1세대 HBM을 개발했습니다. 앞서 2011년에 최태원 SK 회장은 반도체 불황기인데도 하이닉스반도체를 인수하는 결단을 내리고 나서 대규모 투자를 해줬습니다.
당시만 해도 HBM이 각광받는 제품은 아니었습니다. 고사양에 가격이 비싸 수요가 한정적이었습니다. 주로 게임용이었지요.
그래서 삼성보다 SK하이닉스가 HBM에 먼저 뛰어들었을지도 모릅니다. SK하이닉스는 메모리 반도체에 주력하는 회사죠. 반면 삼성은 시스템 반도체도 만들고, 반도체를 위탁생산하는 파운드리도 하고, 패키징 사업까지 하는 종합 반도체 기업입니다. HBM에 투자해도 실익이 적다고 판단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AI 시대가 도래하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현재 SK하이닉스는 HBM의 기술력과 시장점유율 모두 삼성전자를 앞서고 있습니다. 2022년 4세대인 HBM3를 업계 최초로 양산했는데, 이를 주목한 기업이 바로 엔비디아였습니다. 엔비디아의 AI 가속기 H100에 SK하이닉스가 HBM3를 독점 공급하게 되죠.
그 덕에 지난해 4분기 SK하이닉스 영업이익이 1년 만에 흑자전환을 했습니다. 시장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지요. SK하이닉스 측은 “AI 관련 반도체 수요가 늘었고, 특히 HBM3 매출이 전년 대비 5배 이상으로 증가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지난해 SK하이닉스의 전 세계 HBM 시장점유율은 55%, 절반 이상으로 추정됩니다. 54억달러의 55%니까 약 30억달러, 4조원 정도죠. 40%인 삼성전자, 3%인 마이크론과 격차가 있습니다.
SK하이닉스는 지난해 8월 5세대인 HBM3E를 개발했고, 조만간 양산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HBM3E가 엔비디아의 신제품 AI 가속기 H200에 탑재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습니다. 증권사들이 SK하이닉스가 올해 영업이익이 10조원을 넘을 거라는 예측을 내놓는 배경입니다.
최근 김기태 SK하이닉스 부사장은 자사 뉴스룸을 통해 “올해 HBM이 완판됐다”고 밝힌 만큼 실적 대폭 개선은 현실이 될 수 있습니다.
이날 SK하이닉스 주가는 5%가량 급락했습니다. 시장이, SK하이닉스가 언제까지 HBM 시장을 주도할지 의문을 품기 시작한 겁니다.
삼성전자도 이날 업계 최대 용량을 구현한 HBM3E를 공개하고 상반기 양산에 돌입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삼성전자는 최근 반도체 부문 에이스 직원 100여명을 뽑아 'HBM 원팀 태스크포스'를 구성해 시장 주도권 탈환에 나섰지요. 차세대인 6세대 HBM4를 최고 수준으로 개발하겠다는 목표를 내세웠습니다.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 모두 2026년에 HBM4를 양산할 계획인데, 이때 전쟁이 벌어질 겁니다.
하지만 HBM 천하가 언제까지 지속될까요? 벌써 ‘차세대 HBM’ 후보들도 나오고 있습니다. 컴퓨트익스프레스링크(CXL)이 대표적인데요. CPU와 GPU, 메모리 반도체를 빠르게 연결해서 데이터 처리 속도를 확 높여주는 기술입니다.
삼성전자가 CXL에서만큼은 뒤지지 않겠다는 각오로 드라이브를 걸고 있고요. 오는 26일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열리는 반도체 학회 멤콘 2024에서 이 기술에 대해 발표할 것으로 보입니다.
기획·진행 노유정 기자 yjroh@hankyung.com
촬영 박정호 PD 디자인 이지영·박하영
편집 박정호 PD
노유정 기자 yjro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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