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희대 대법원장 취임 후 첫 신임 대법관으로 임명된 엄상필(사법연수원 23기·55)·신숙희(25기·54) 대법관이 4일 업무를 시작한다. 올해 1월 임기를 마친 안철상(중도)·민유숙(진보) 전 대법관의 뒤를 이어 6년간 대법관직을 수행한다. 두 신임 대법관의 판결 성향은 ‘중도’로 분류된다. 이에 따라 13명으로 구성된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무게추가 한층 더 ‘중도·보수’쪽으로 기울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대법원에는 산업 노동계의 바로미터가 될 만한 굵직한 전원합의체 재판이 줄줄이 대기 중이다. 경제계가 전원합의체 지형 변화를 주목하는 이유다.
‘친노동’ 판결 흐름 제동 걸리나
엄상필·신숙희 신임 대법관은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임명된 네 번째와 다섯 번째 대법관이다. 두 대법관 모두 판결 성향은 중도로 분류된다. 이에 따라 전원합의체 중도·보수 대 진보 비율은 기존 ‘7 대 6’에서 ‘8 대 5’로 재편된다. 전원합의체는 기존 판례를 변경할 필요가 있거나 사회적 파급력이 큰 중요 사건을 다룬다. 대법원장과 대법관 12명(법원행정처장 제외)으로 구성된다. 다수결을 통해 출석 과반수의 의견에 따라 판결하기 때문에 법관 구성이 선고 결과에 미치는 영향이 절대적이라는 게 법조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앞서 김명수 전 대법원장 재임 기간에 진보 성향 판사 모임인 우리법연구회, 국제인권법연구회 출신 대법관이 연이어 임명되면서 ‘진보 과반’의 전원합의체 구도가 형성됐다. 우리법·국제인권법연구회 초대회장을 지낸 김 전 대법원장이 사실상 전원합의체의 ‘캐스팅보트’를 쥐면서 친노동 성향 판결이 쏟아졌다. 작년 5월 전원합의체는 “사용자가 취업규칙을 근로자에게 불리하게 변경할 때 노동조합 또는 근로자 과반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새로운 판례를 내놓으면서 45년간 통용된 ‘사회 통념상 합리성’ 판례를 뒤집었다.
전원합의체 판결은 아니지만 대법원이 작년 6월 “불법파업에 참여한 노조원에게 기업이 손해배상을 청구할 때는 조합원별로 책임 정도를 개별 판단해야 한다”고 판결하면서 경영계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경영계에선 불법 쟁의에 대한 손해배상 책임을 묻는 것이 훨씬 어려워질 것이란 우려가 나왔다.
하지만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이런 판결 흐름에 제동이 걸리는 모습이다. 보수 성향의 오석준 대법관(2022년 11월 취임)에 이어 작년 7월 중도 성향인 서경환·권영준 대법관이 취임하면서 전원합의체의 중도·보수 대 진보 비율은 ‘6 대 7’에서 ‘7 대 6’으로 역전됐다. 올해 진보 성향인 김선수·노정희·김상환 대법관도 임기 만료를 앞두고 있어 전원합의체의 중도·보수 성향은 더욱 짙어질 전망이다.
굵직한 노동 판결 영향에 경영계 주목
산업계에선 전원합의체의 지형 변화가 대법원에 계류 중인 굵직한 노동 사건 선고에 미칠 영향에 주목하고 있다. 수년째 결론을 내리지 못한 사건 선고 결과가 하급심과 사회에 미치는 파장이 크기 때문이다. 금속노조가 “원청(현대중공업)에 대한 하청노조의 단체교섭권을 인정해달라”며 낸 소송이 대표적이다. 1·2심은 회사가 승소했지만 대법원에서 4년8개월째 계류 중이다. 이 사건의 결론은 대리점 택배 운전사 노조의 단체교섭권 인정 여부를 다투는 CJ대한통운 사건 상고심 등 다른 사건 판결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어 노동·산업계가 예의주시하고 있다.
정기상여금의 통상임금 여부를 판단할 때 ‘재직자 조건’을 다는 게 맞는지를 따지는 세아베스틸 사건 역시 전원합의체에 계류 중이다. 경영성과급의 평균 임금 인정을 두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근로자들과 벌이는 퇴직금 청구 소송도 연내 전원합의체에 회부될 가능성이 높다. 한 노동전문 변호사는 “노동 사건은 대법관의 성향에 따라 결과가 크게 달라질 수 있는 대표적인 영역”이라고 말했다.
민경진/김진성 기자 mi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