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 그리던 화가, 꽃을 든 남자로 변신…프리즈 LA가 열광하다

입력 2024-03-07 17:34   수정 2024-03-14 17:02


전 세계 갤러리들이 컬렉터들을 매혹하기 위해 한자리에 모이는 아트페어. 지난달 29일부터 나흘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산타모니카공항에서 열린 ‘프리즈 LA’에선 30대의 국내 작가 한 명이 이변을 일으켰다. ‘꽃 정물’ 20여 점을 아트페어 시작 2시간 만에 모두 매진시킨 것. 주요 작품 3점은 2분도 안 돼 팔려나갔다. 이 그림의 주인공은 10년간 꽃에 빠져 지낸 김성윤 작가(39·사진)다.

프리뷰 때부터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창립 54년 된 갤러리현대가 30대 젊은 작가에게 단독 부스를 내준 것도 최초였고, 그의 그림을 멀리서 보면 마치 17세기 플랑드르 화가들의 정물화를 모사한 듯 보였기 때문이다. 미국 전역에서 몰려든 컬렉터들은 이렇게 평가했다. “익숙한 꽃 정물인데, 가까이서 보면 완전히 새로운 해석이다. 화병은 동양적이면서도 모던한 분위기가 매혹적이다.”
다르게, 치열하게 바라보기

그의 꽃 정물 시리즈인 ‘Arrangement(꽃꽂이)’는 2015년께 시작됐다. 이전까지 그는 인물화를 중심으로 작업해왔다. 그의 그림은 두 가지 면에서 시선을 사로잡는다. 우선 화병에 꽂힌 꽃이 다르다. 어떤 꽃봉오리는 뭉개져 있고, 어떤 꽃잎은 막 떨어지는 중이다. 꽃 대신 풍선이 자리하거나 폭삭 시든 상태인 것도 있다.

이보다 더 눈길을 끄는 건 화병. 누구나 아는 세계적인 통조림의 상표 또는 유리병 브랜드가 화병을 대신하거나 한국의 도예가 유의정 작가의 작품들이 그대로 반영되기도 한다.

“꽃에는 아름답다, 예쁘다는 수식어가 습관처럼 붙지만 오히려 꽃을 아름답게 하는 건 그걸 담고 있는 화기라고 생각했어요. 물을 담을 수 있는 모든 것이 화기가 될 수 있는데, 무심하게 꽂힌 꽃들이 오히려 상투적이지 않은 진정한 아름다움을 담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전까지 인물화, 좀비가 된 선배 화가의 모습 등 다소 어두운 톤의 그림을 그려온 그가 꽃을 그림의 소재로 삼게 된 데는 매우 현실적인 사연이 있다. 20대 중반 결혼 직후 서울 창동에 살 당시 집 근처 꽃 시장에서 아내를 위해 자주 꽃을 사다 주곤 했던 것. 벌이가 시원치 않던 시절 미안한 마음에 사다준 꽃을 아내는 그저 무심하게 분리수거함에서 꺼낸 빈 플라스틱병, 유리곽 안에 툭툭 꽂아뒀다. 섭섭한 마음도 있었지만 어느 날 그 장면이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다가왔다. 동시대 우리의 일상을 반영한 장면이라고도 생각했다고.
차용과 창작 사이…아카이브의 힘

김성윤의 꽃들은 장미, 라일락, 작약, 해바라기 등 종류가 다양하다. 같은 계절에 피지 않는 꽃들을 조합해 놓으니, 현실에선 보기 힘든 구도다. 그를 도운 건 구글. 실제 꽃꽂이를 한 상태의 사진 위에 구글 이미지 검색으로 찾은 꽃들을 컴퓨터 화면 속에서 재조합한 뒤 그린다. 개화 시기와 피는 장소가 다른 꽃들을 한 화면에 담아 시공간을 초월했던 벨기에 정물화 거장 얀 브뤼헐(1568~1625)과 네덜란드 정물 대가 얀 반 허이섬(1682~1749)의 영향을 받았다.

김 작가는 시리즈를 하나 시작할 때 자신만의 아카이브를 빽빽이 구축한다. 마네가 죽기 1년 전 시골 요양병원에서 그린 16점의 꽃 그림을 모은 책, 미술사의 꽃과 죽음을 표현한 수많은 그림을 수집했다. 금방 시들어버리는 꽃들은 미술사 속에서 인생의 덧없음과 죽음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하지만 그는 “그림 속 꽃은 시들지 않는다. 자연의 보편적 아름다움에 집중하고 그것을 오래 지키고자 하는 욕망에 가깝다”고 말한다.

“앞서 살았던 화가의 작품 세계를 존중하고, 그들을 스승이라고 생각합니다. 미술사를 많이 활용하고 공부하지만,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고 재료로 활용하지요.”
“낡고 지루한 종교화도 재해석하고 싶다”
회화 작가 대부분이 혼자 작업하는 것을 즐기지만 김 작가의 경우 좀 다르다. 최근 작품에 등장하는 화병은 또 한 명의 주목받는 30대 도예가 유의정 작가의 작품들. 둘의 인연은 몇 해 전 경기 남양주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함께 선정되면서 시작됐다. 4년간 옆 작업실을 쓰던 그는 전통적인 형식과 동시대 이미지를 뒤섞는 유 작가의 기법에 매료됐다. 그의 도자 작품을 그의 캔버스 안에 불러들이고 싶다고 제안했고, 유 작가도 흔쾌히 수락했다. 농구공 모양의 청자, 백자 위를 흘러내리는 물감 등의 작업을 그림으로 그렸다. 이번 프리즈 LA 페어에서도 일부 도자기가 그림과 함께 놓였다.

10년간 꽃을 그리는 작업이 지루하진 않을까. 그는 “꽃 정물을 시작할 때부터 지금까지 여러 변형과 변화, 배우는 과정이 매일 있었다”며 “무엇을 그리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의 관점의 문제”라고 했다.

그가 존경하는 화가 중 한 명은 데이비드 호크니다. 이유는 단순하다. 30대와 40대, 50대 때의 그림이 전혀 다르다는 것. 과거엔 절대 못 그렸을 그림을 노년의 화가가 그리는 것을 보고 ‘사물을 보는 것’에 대한 고민을 함께한다고 했다.

“꽃 정물 다음은 종교에 관한 것이 될 것 같습니다. 종교화가 오래되고 지루한 그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시기 화가들이 보지 못했던, 다른 관점과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림으로 전달해보고 싶어요.”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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