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칼럼] 의사 숫자만 문제가 아니다

입력 2024-03-08 18:21   수정 2024-03-09 01:04

2016년 원격진료 시범사업이 이뤄진 대구. 70대 노부부가 사는 집을 간호사와 함께 방문했다. 76세인 환자는 10여 년 전 교통사고로 왼쪽 골반이 부러진 뒤 근육이 오그라들어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같은 자세로 오래 누워 있다 보니 지독한 욕창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하지만 간호사는 소독과 같은 간단한 처치도 하지 못했다. 스마트폰 화면 너머 의사에게 욕창 부위를 보여줘도 소용이 없었다. 의료법상 방문 간호사가 소독 처치를 하려면 복잡하고 긴 절차를 거쳐야 했기 때문이다. 간호사는 환자의 욕창 부위를 사진으로 찍어 병원으로 가서 의사에게 보여준 뒤 ‘지시서’를 받고 다시 환자 집으로 와야 했다. 당장 고통에 신음하는 어르신에게는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간호사는 주름지고 메마른 손으로 남편의 욕창을 소독하는 노부인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 역시 몇 년 전 암 치료를 받은 75세 노인이었다.

지난 주말 서울 여의대로에서 세(勢)를 과시한 의사들의 파업을 보면서 그때 기억이 떠올라 의료법을 다시 들여다봤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났지만 법은 그대로였다.

저출산·고령화 위기에 직면한 우리 사회의 많은 난제를 의료 영역에서 풀려고 시도할 때마다 의료계는 강하게 반발했다.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 때도 의대 증원에 반대하며 집단행동으로 정부에 맞섰다. 절박한 환자들을 볼모로 의사들이 완력을 행사할 때마다 정부와 정치권은 번번이 뒤로 물러섰다.

애초 ‘소아과 오픈런’ 문제로 의대 정원 확대의 필요성이 부각됐지만, 의사 수를 늘려야 하는 가장 시급한 이유는 급속한 고령화다. 2006년부터 매년 3058명 안팎으로 의대 정원이 사실상 동결되는 동안 의사는 8만2000명에서 13만5000명(2022년 기준)으로 늘었다. 17년 동안 65.6% 증가했다. 같은 기간 65세 이상 고령인구는 455만7000명에서 926만7000명으로 103.4% 폭증했다. 간호사가 그동안 19만3000명에서 48만1000명으로 150.8% 증가한 걸 고려하면 의사 수만 20년 가까이 묶어둬야 했는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고령화와 함께 지방 소멸에 따른 의료 공백을 조금이라도 메울 수 있는 대안으로 비대면 진료가 꼽힌다. 이 역시 의사들의 반대 때문에 아직도 규제에 묶여 있다. 현행 의료법상 비대면 진료는 의사와 의사·간호사 등 의료인끼리만 가능하다. 정부는 2010년부터 의사와 환자 간 비대면 진료를 허용하는 방향으로 법 개정을 추진했다. 의료계는 의사가 직접 환자를 봐야 의료 사고를 막을 수 있다며 반발했다. 욕창 같은 지속적 관리가 필요하거나 고혈압 등 만성 질환을 앓고 있는 일부 환자에게만 제한적으로 허용하자고 설득했지만, 그마저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게 16년이 흘렀다. 의료법이 개정되지 않는 이상 비대면 진료 서비스를 확대·발전시킬 근거가 없다. 정부가 최근 전공의 집단행동으로 비대면 진료를 확대한 건 한시적인 조치에 불과하다.

급증하는 간병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는 원격 건강 모니터링도 활발해져야 한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08년 3조6000억원 규모인 사적 간병비는 2022년 10조원으로 177.8% 급증했다. 나이 드신 부모님의 증세가 중증 질환으로 악화하기 전에 전문가에게 관리받을 수 있다면 자녀들의 간병비 부담은 조금이라도 덜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원격 건강 모니터링 역시 의사들 반대에 막혀 있다.

얼마 전 취재 목적으로 방문한 서울의 한 실버주택에서 눈에 띄었던 것도 집마다 설치된 건강 모니터링 센서와 동작감지 센서였다. 어르신의 수면 중 호흡과 움직임을 감지해 응급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장치다. 실버주택에 상주하는 간호사는 해당 데이터를 기초로 거주 노인들의 건강 관리를 도와준다. 실버주택은 상주 간호사가 같은 공간에 있기 때문에 규제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현재로서는 비용 감당이 가능한 소수의 노인만 누릴 수 있는 서비스다.

지금은 의대 증원이 뜨거운 이슈지만 단순히 의사 수만 늘리는 데서 멈춰선 안 된다. 수십 년을 미뤄온 의료 시스템 전반의 개혁을 위한 논의를 본격화해야 한다. 의사들이 진료 현장이나 수술실에서 모든 것을 관장한다고 국가적 의료 체계까지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은 오만한 착각이다. 무엇보다 정부가 강요하기 전에 의사들이 국민 곁으로 돌아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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