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이 보기에 형은 상종 못할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행색이 초라한 데다 잘 씻지도 않아서 항상 술과 담배에 찌든 냄새를 풍겼습니다. 건강 관리를 하지 않아 몸에서는 고약한 냄새를 풍겼고요. 게다가 감정 기복은 극단적이었고, 고집도 말도 못 하게 셌습니다. 그런가 하면 형은 구제 불능의 ‘금사빠’(금방 사랑에 빠지는) 기질이 있었습니다. 처음 만난 여성에게 사랑한다고 하거나, 임자가 있는 사람에게 집착해 주변 사람을 엄청나게 불편하게 만들곤 했지요.
형은 변변한 직장 없이 부모님에게 얹혀살았습니다. 가족들은 형을 불편하게 여겼습니다. 부모님조차 매일 한숨을 쉬었습니다. 형제자매들은 아예 대놓고 말했습니다. “오빠가 집을 나가서 속을 덜 썩이는 게 엄마 건강에도 도움이 될 거야.”
하지만 딱 한 명, 형을 쏙 빼닮은 동생만큼은 달랐습니다. 어디 하나 내세울 것 없는 형. 하지만 오직 동생에게는 형의 내면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특별한 무언가를 봤습니다. ‘언젠가 형은 역사에 위대한 인물로 남을 거야.’ 동생은 믿었습니다. 동생 역시 형과 지내는 게 편했던 건 아닙니다. 둘은 걸핏하면 소리를 지르며 싸웠습니다. 하지만 어떤 일이 있어도 동생이 형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잃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생활비를 대 주며 형을 먹여 살린 것도, 여러 곳을 데리고 다니며 형의 세상을 넓혀준 것도, 칭찬과 따끔한 조언으로 형의 발전을 이끈 것도 모두 동생이었습니다.
형의 이름은 빈센트 반 고흐(1853~1890), 동생은 테오 반 고흐(1857~1891). 고흐와 그의 동생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하지만 둘의 성격은 꽤 달랐습니다. 테오는 전형적인 ‘착한 모범생’. 반면 빈센트는 예술적 감수성이 뛰어났지만 고집이 세고 변덕이 심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 싹이 보였습니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빈센트는 나무에 올라가는 고양이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어머니는 그림을 보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지요. 하지만 빈센트는 내 마음엔 안 든다며 그림을 찢어버렸다고 합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말 알 수 없는 녀석이야. 저 녀석이 커서 뭐가 될지….” 부모님은 이렇게 얘기하곤 했습니다. 빈센트가 우수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고등학교를 자퇴했던 것도 특이한 성격 때문이었습니다.
학교도 다니지 않는 장남을 놀게 둘 수는 없지요. 아버지는 빈센트를 친척이 공동대표로 있는 대도시의 큰 갤러리에 취업시켰습니다. 다행히도 그는 잘 적응했습니다. 미술에 관심이 많았던 빈센트는 좋은 그림이란 무엇인지, 고객들이 어떤 그림을 좋아하는지 등 전문 지식을 빠르게 배워 나갔습니다. 빈센트에게는 훌륭한 갤러리스트가 될 자질이 있어 보였습니다. 빈센트가 자리를 잡은 것처럼 보이자 부모님도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렇게 3년이 흘렀습니다.
테오가 빈센트의 사이가 특별해진 건 이때였습니다. “갤러리 일이 너한테 맞을지, 형을 찾아가서 잘 배워 보렴.” 성인이 된 테오에게 부모님은 이렇게 권했습니다. 빈센트는 오랜만에 동생을 반갑게 맞이했습니다. 낮에는 갤러리와 도시를 구경시켜 줬고, 밤이면 함께 걸으며 삶과 예술에 대한 깊은 대화를 나눴지요. 테오는 형의 식견과 통찰력에 감탄했습니다. 집에 돌아온 테오는 빈센트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집에 돌아왔는데 형이 없어서 기분이 정말 이상했어. 형이 정말 그리워. 나도 형처럼 갤러리에서 일할 거야.” 평생에 걸친 형제간의 편지는 이렇게 시작됐습니다.
이런 성격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게 그의 수많은 짝사랑에 얽힌 이야기들입니다. 그는 평생 여러 여성을 짝사랑했습니다. 사랑 고백도 많이 했습니다. 하지만 상대방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울 뿐이었습니다. 만난 지 얼마 안 된 친하지도 않은 사람이 갑자기 열정적인 사랑을 고백하니 당연한 일이었겠지요. 고백은 매번 거절당했고, 그때마다 빈센트는 크나큰 마음의 상처를 받았습니다.
빈센트의 숨겨진 광기가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직접적인 계기도 사랑의 실패였습니다. 그에게는 목숨보다 더 사랑하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물론 짝사랑이었지요. 여인은 빈센트를 엄청나게 부담스러워하며 피했었고요. 하지만 어쨌거나 그 여인이 결혼하면서 빈센트는 우울증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눈에 띄게 말수가 급격히 줄고 음침해진 겁니다. 갤러리스트는 항상 사람을 만나야 하는 직종. 빈센트의 업무 성과가 바닥을 긴 것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대신 빈센트는 신에서 구원을 찾았습니다. “부자 고객을 꼬드겨서 그림을 파는 이런 무의미한 일은 이제 그만두겠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할 거야.”
이때부터 빈센트의 본격적인 방황이 시작됐습니다. 보조 목사, 서점 일자리, 전도사 양성학교…. 가는 곳마다 그는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조울증을 비롯한 정신질환은 계속 심해졌습니다. 짝사랑에 실패했다는 이유로 공부를 그만두기도 했습니다. 벨기에 시골의 탄광 마을에 전도사로 파견됐을 때도 방황은 계속됐습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도 빈센트는 광부처럼 살겠다며 더러운 옷을 입고, 밥을 거의 먹지 않고, 비누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그를 광부들은 “옆에 가면 병이 옮을 것 같다”며 피했지요.
이제 빈센트의 존재는 가족들에게 큰 부담이었습니다. 신경을 아무리 써 줘도 사고만 치는 밑 빠진 독, 가족들 평판에 먹칠하는 짐 덩어리나 다름이 없었지요. 여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잠깐 집에 돌아온 빈센트에게 여동생은 “그냥 결혼식에 안 오면 안 되냐”고 말했습니다. “솔직히 오빠가 여기 있는 게 거슬려. 오빠가 부모님께 얼마나 큰 짐인지 모르지? 존재 자체가 짜증 난다고!” 아버지도 조심스레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러더구나. 네가 마음이 많이 힘들다고…. 좋은 병원을 알아봤는데, 당분간 병원에서 마음을 좀 치료하면 어떻겠니?”
내가 정신병자라고? 빈센트의 손이 분노와 좌절로 부들부들 떨렸습니다. 여기에 믿었던 테오마저 한마디를 거들었습니다. “형. 형은 변했어. 예전 같지 않아. 온 가족이 형 때문에 답답해. 이제 제발 정신 차려. 일자리를 찾아서 형도 자기 힘으로 먹고살아야지. 판화를 만드는 판화가는 어때? 도면을 그리는 제도사도 괜찮아 보여.” 진심을 담은 쓴소리였지만, 빈센트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너까지 나한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그림 그려서 푼돈이나 벌라는 거야? 아버지는 아예 나를 정신병원에 넣으려고 하더군. 나는 절대로 이 일을 잊지 않을 거야. 아버지도 너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다른 가족들의 가시 돋친 말들과는 달리, 동생의 진심 어린 충고만큼은 계속 생각났습니다. 그래서인지 전도사로서의 업무도 영 손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책상 앞에 앉아 뭔가를 쓰려해도, 정신을 차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래. 내가 가장 행복한 건 그림을 그릴 때야. 테오가 옳았어.’
결국 빈센트는 1년 후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고 본격적으로 그림 공부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1년 만에 테오에게 화해를 청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빈센트의 37년 인생 중, 화가로 산 마지막 10년이 이렇게 시작됐습니다.
테오는 형을 용서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빈센트에게 생활비를 보내주기 시작했습니다. 테오가 프랑스 파리에서 잘나가는 갤러리스트긴 했지만, 결코 쉬운 결정은 아니었습니다. 테오의 연봉은 지금 돈으로 따져서 대략 5000만원 정도. 그중 3분의 1 정도가 빈센트에게 갔습니다. 여기에 장남 역할을 하지 못하는 형을 대신해 부모님에게 생활비도 부쳐드려야 했습니다.
빈센트가 생활비의 대가라며 보내주는 그림은 전혀 팔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테오는 아랑곳하지 않고 형을 계속 믿었습니다. 형에 대한 사랑과 깊은 이해는 테오에게 남들이 보지 못하는 형의 무한한 잠재력을 볼 수 있게 해줬습니다. 때로는 칭찬을, 때로는 냉철하고 분석적인 비평으로 테오는 빈센트를 이끌었습니다. 파리의 최신 미술 경향을 편지로 전해주기도 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팔 수 있는 작품이 거의 없어. 일단 그림 색감이 너무 어두워. 요즘 파리에서는 인상주의라는 게 유행하고 있는데 말이야….”
남들의 말이라고는 듣지 않은 빈센트였지만, 그도 테오의 조언만큼은 마음을 열고 받아들였습니다. 테오의 조언이 진심 어린 애정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요. 덕분에 빈센트의 작품은 빠르게 발전했습니다.
하지만 그림 실력과 반대로 빈센트의 건강은 갈수록 나빠졌습니다. 워낙 몸을 돌보지 않으며 살아온 탓이었습니다. “멀쩡한 이가 없어. 상태가 너무 안 좋은 이를 다 뽑았는데, 10개가 넘더군. 남들이 나보고 40대처럼 보인대.” 겨우 서른둘의 나이에 빈센트는 테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얼마 안 돼 빈센트는 테오에게 “파리에서 같이 살자”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같이 살자. 생활이 너무 어려워. 네 집에서 그림을 그릴게. 나한테 부쳐주는 돈도 절약되잖아.” 아무리 그래도 이런 부탁을 들어주는 건 쉽지 않았습니다. 형이 보통 사람도 아니고요. 하지만 테오는 알아챘습니다. 형이 외로움에 질식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요. 결국 테오는 형을 받아줬습니다.
예상했던 대로 형과 같이 사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빈센트는 예술에 대한 자기 생각을 비롯해 이런저런 얘기를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잘 때까지 끊임없이 쏟아냈습니다. 테오의 반응이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불같이 화를 냈지요. 서로 물건을 집어 던지며 격렬하게 싸우는 일도 다반사였습니다. 원래부터 건강이 좋지 않았던 테오가 형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 쓰러진 일까지 있었습니다.
그래도 테오는 빈센트를 살뜰히 챙겨 줬습니다. 십수 년 전 네덜란드 화랑에서 일하던 형을 찾아갔을 때, 형이 자신을 따뜻하게 돌봐줬던 것처럼요. 테오는 빈센트를 미술관과 갤러리에 데리고 다니며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을 보여줬습니다. 빈센트는 크게 기뻐했습니다. “편지로 네가 인상주의 얘기를 하면서 조언을 해줬을 때는 솔직히 잘 이해가 안 갔는데, 이제야 알겠어.” 앙리 드 툴루즈-로트레크를 비롯한 당대의 탁월한 예술가들을 빈센트에게 소개해준 것도 테오였습니다. 그리고 빈센트는 마침내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할지 감을 잡아가기 시작합니다. 늘 곁에서 손을 잡아준 동생 덕분이었습니다.
마침내 빈센트는 혼자 서기 위한 첫걸음을 뗍니다. “테오, 파리는 나한테 너무 춥구나. 건강이 계속 나빠지고 있어. 이제 나는 떠날 때가 된 것 같아. 고갱이라는 친구와 따뜻한 남쪽으로 가려고 해.” 여전히 테오에게 생활비를 의존하긴 했지만요.
빈센트를 떠나보낸 테오. 텅 빈 집에 돌아와 빈센트가 그린 그림들을 보며 자신이 형을 그리워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형은 확실히 같이 살기 쉽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곁에서 지켜본 빈센트의 재능과 예술적인 감성, 독창성은 독보적인 수준이었습니다. ‘역시 내 생각이 옳았어. 형은 천재야.’ 그는 여동생에게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형은 정말 똑똑한 사람이야. 앞으로 몇 년만 더 있으면 형은 틀림없이 유명한 사람이 될 거야.”
남쪽으로 떠난 빈센트는 여러 일을 겪었습니다. 고갱과의 불화, 정신질환 발작으로 자기 귀를 잘라버린 일, 정신병원 입원, 이어지는 발작…. 여전히 그의 삶은 쉽지 않았습니다. 수십년간 그를 괴롭혔던 정신질환과 지난날 겪었던 여러 고생, 좋지 않은 생활 습관들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분명 그의 상황은 전과 달랐습니다. 동생이 준 사랑이 그의 마음을 단단하게 지탱해준 탓에, 그의 작품세계가 마침내 꽃을 피웠거든요. 마침내 테오는 빈센트가 보내온 그림을 판매하는 데 성공합니다. “형, 이제 돈 생각은 안 해도 될 것 같아. 형이 보내준 그림이 팔렸다고!”
마침 테오에게서도 좋은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테오가 결혼을 한 거지요. 빈센트는 동생이 행복을 찾았다는 소식에 무척이나 기뻐하며 축하한다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돼 도착한 답장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겨울, 아마도 2월쯤에 예쁜 남자아이를 낳을 예정이야. 아이의 대부가 돼 주겠어? 이름은 빈센트라고 지으려고 해.” 빈센트는 편지를 읽고 눈물을 흘릴 정도로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동생의 깊은 사랑에 다시 한 번 감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고흐는 그간 쓴 적 없는 밝은 색깔을 사용해 심혈을 기울여 꽃과 꽃봉오리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몬드 나무 그림이었습니다.
마침내 빈센트가 “내 꽃 그림 중 최고”라고 자평할 정도의 걸작이 완성됐습니다. 테오는 “너무나도 아름답다”며 그림을 아기 침대 위에 걸었습니다. 그러는 사이 빈센트의 작업실 창밖에서는 나무들이 하나씩 꽃을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빈센트는 캔버스와 붓을 들고 밖으로 나가 그 아름다운 풍경을 그렸습니다. 여전히 빈센트의 몸은 쇠약했고 정신질환 발작도 이어졌지만, 그의 앞길에는 꽃길만 펼쳐져 있을 듯했습니다.
하지만 파국은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찾아왔습니다. 1890년 7월 27일 정신질환이 도진 빈센트가 권총으로 자신을 쏜 겁니다.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달려간 테오에게 빈센트는 말했습니다. “항상 이런 식으로 죽고 싶었어.” 테오는 울며 말했습니다. “형은 나을 거야. 분명히 다 괜찮아질 거야. 절망하지 마.” 빈센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아니, 슬픔은 영원히 계속된다.”
태어날 때부터 세상과 불화했던 형. 누구보다도 순수한 영혼과 탁월한 천재성의 소유자였지만, 평범한 이들과 잘 지내기에는 너무나도 비범했던 형. 손대는 것마다 실패하고 가족에게조차 외면받았던 형의 외로움과 고통. 그 고난을 견디느라 망가져 버린 몸과 마음. 빈센트는 이제 그 모든 걸 떠나려 했습니다.
오랫동안 형을 지켜봤기에, 테오는 형의 얼굴에 괴로움과 함께 떠오른 안도감을 보고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빈센트는 그렇게 테오의 품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그의 나이 서른일곱이었습니다.
형처럼 테오도 건강한 체질은 아니었습니다. 부모님과 형, 가족을 부양하느라 한계에 다다랐던 그의 몸은 형이 세상을 떠나자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6개월 뒤 테오도 아내와 어린 아들을 남기고 서른넷의 나이로 형을 따라갔습니다.
이 같은 빈센트의 삶 이야기는 그 자체로 완성도 높은 비극적인 드라마입니다. 모진 수난과 고난을 겪고 마침내 세상에 자신의 이름을 떨치려는 순간 맞이한 죽음, 그리고 극적인 부활. 수난-죽음-부활로 이어지는 이런 이야기는 인간이 본능적으로 가장 끌리는 스토리 구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종교적이기까지 합니다. 그의 어려웠던 삶을 자세히 다룬 책들이 오늘날까지도 세계 각국에서 수없이 출간되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빈센트 한 사람의 삶만 보고 그를 온전히 이해하기는 불가능합니다. 빈센트만 보면 그는 하늘이 내린 천재이자, 그 천재성이 가져온 정신질환으로 고통받다 죽은 비극의 주인공입니다. 그렇게 이해하는 편이 더욱더 인상적이긴 합니다. 대부분 사실이고요. 하지만 이렇게 되면 빈센트는 우리 일반인과는 태생부터 완전히 다른,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빈센트의 삶에서 배울 것도 없겠지요. 그저 할 수 있는 건 한 천재의 광기 섞인 벼락같은 솜씨에 작품에 감탄하는 일뿐입니다.
테오의 삶을 함께 보면 얘기는 달라집니다. 빈센트가 미술사에 영원히 남을 천재라는 사실은 여전히 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도 부족한 점이 많은 인간이었습니다. 실상은 평범한 사람들보다도 훨씬 못한 면모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동생의 믿음과 희생이 그의 재능을 꽃피게 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고흐의 그림에서는 전과 다른 온기와 친근감이 느껴집니다. 모자라지만 특별한 형, 그 형을 알아보고 믿어준 착한 동생의 따뜻함 말입니다.
빈센트의 유언처럼 어떤 슬픔은 영원히 계속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영원히 기억되는 사랑도 있습니다. 미술사에 남은 이 형제의 사랑이 그랬습니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
<i>*이번 기사 내용은 ‘Vincent and Theo: The Van Gogh Brothers’(Deborah Heiligman 지음), ‘빈센트 반 고흐’ (인고 발터 지음, 유치정 옮김, 마로니에북스-Taschen), 빈센트 반 고흐가 주고받은 편지를 모은 공식 데이터베이스(vangoghletters로 검색하시면 누구나 무료로 영문 편지 전문을 읽어볼 수 있습니다)를 참조해 작성했습니다.</i>
*독자 여러분의 응원과 격려에 힘입어 <명화의 탄생, 그때 그 사람>이 출간됐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온오프라인 서점에서(서울 지역 서점에선 주말부터, 이외 지역 서점에서도 며칠 내로) 만나 보실 수 있습니다.
책 안에는 인터넷 연재분을 다듬은 내용에 더해 인상주의 화가 알프레드 시슬레 등 책에서 처음 공개되는 화가들의 이야기가 일부 실려 있습니다. 오늘 고흐 형제에 대한 기사도 마찬가지로, 책에는 테오의 아내가 어떻게 고흐 형제를 ‘영원불멸의 스타’로 부활시킬 수 있었는지 그 뒷얘기가 자세히 실려 있습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다시 한 번 깊이 감사드립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5만여명 독자가 선택한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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