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창작자에게 고독이란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이자 함께 가야 할 동반자이다. 모든 창작의 순간은 혼자만의 시간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사진가 구본창(71·사진)이 자신의 에세이 <공명의 시간을 담다>에 쓴 말이다. 스스로를 지극히 내향적인 사람이라고 정의하는 그는 아마도 인터뷰하기 가장 어려웠던 인물 중 하나로 남을 것 같다. 말수가 적거나 수줍음을 많이 타서가 아니다. 그의 대규모 회고전 '구본창의 항해' 폐막을 나흘 앞둔 지난 6일 서울시립미술관. 작가를 알아 본 전시 관람객들이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사인을 받거나 함께 사진을 찍자며 줄을 늘어서서다. 고독을 평생 친구로 여기며 살았다는 구 작가는 한 사람 한 사람 정성껏 이름을 묻고 기꺼이 응답했다. 흰머리가 성성한 작가의 믿기 어려운 수준의 '아이돌 스타급 인기'를 실감하며 예정보다 20여 분이 지나서야 겨우 인터뷰 장 소에서 마주 앉을 수 있었다.
▷팬덤이 있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였습니까.
“얼떨떨합니다. 45년을 카메라와 살았는데 이런 적은 없었거든요. 도예가, 저의 책을 읽고 사진을 전공한다는 학생, 달항아리 사진에 매료됐다는 중장년층까지…. 3개월간 정말 많은 분을 직접 만났네요. 45년의 방대한 작업들을 한 전시에 담으며 사실 사람들이 난해하다고 여기진 않을지 걱정이 많았거든요.”
▷20~30대가 특히 열광한 것 같습니다.
“사진이라는 장르의 인기와 수요가 미미했던 1990년대 전후에 비하면 지금은 다른 세상입니다. 디지털로 만들어낸 이미지, 모든 것이 이미지인 시대에 사는 세대에게 오히려 아날로그 시절에 ‘만들어 냈던’ 사진들이 더 와 닿은 것 같습니다.”
▷1980~1990년대 사진을 꿰매고, 필름을 긁어내고, 사진을 한지에 인화했는데요.
“화가가 되는 게 오랜 꿈이었어요. 부모님의 반대로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했지만, 회사(당시 대우실업)를 다니다 거의 도망치듯 독일 함부르크로 유학을 갔죠. 이전에 보지 못했던 이미지들을 흡수하고, 대상에 숨을 불어넣는 관찰의 방식 등을 배웠어요. 1980년대 중반 6년 만에 서울로 돌아왔지만 방황의 시간도 길었습니다. 이방인이 된 양 낯선 감정들을 떨치기 위해 자화상도 찍고, 도시를 찍기 시작했어요. 중요한 건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하고 싶었습니다. 사진만으론 갈증이 풀리지 않았던 것도 있고요. 대형 인화지가 없어 조각보처럼 재봉틀로 하나하나 꿰매는 실험적인 작업들이 한계를 넘기 위한 도전이었습니다.”
구본창은 세계에 흩어진 백자들을 찾아가 카메라 렌즈와 마주 보게 했다. 수백 년의 시간을 거슬러 조선의 백자를 마주할 때마다 품에 끌어안고 “어쩌다 네가 여기까지 왔느냐, 네 영혼을 사진에 담고 싶으니 너도 꼭 응해야 한다”고 속삭였다. 상처와 흠집마저도 그의 손을 거쳐 새로운 삶을 찾는다. 그의 백자 사진들은 말갛고 청초하다. 복숭아빛 배경에 불그스름한 얼굴을 하기도, 흑백의 수묵화 속 오브제 같기도 하다.
▷백자와 탈 등 한국의 ‘사물’에 빠진 계기가 있습니까.
“1989년 외국에 머물 때 한 잡지에서 서양인 노부인이 달항아리 옆에 앉은 사진을 우연히 봤어요. 작은 한 장의 사진에 애틋한 감정이 들더군요. 2004년 교토에 갔을 때 우연히 그 장면을 다시 마주했어요. 일본 잡지에 소개된 조선백자를 보고 15년 전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알고 보니 그 달항아리는 일본 미학자 야나기 무네요시에게 도예를 배우기 위해 일본에 왔던 영국 도예가 버나드 리치가 당시 경성에 왔다가 사가지고 간 달항아리였어요. 사진 속 노부인은 리치의 제자 루시 리였고요(오스트리아 출신인 루시 리는 패션 디자이너 이세이 미야케의 단추를 제작한 인연으로 1989년 동양도자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구 작가가 15년 전 본 사진이 그 도록에 실린 사진이었다).”
▷백자, 황금을 포함해 정물 사진들은 마치 그림 같습니다. 만지고 싶고, 튀어나올 것만 같고요.
“사물의 본질을 어떻게 전달할까, 그러면서 어떻게 다르게 찍을까를 늘 고민합니다. 백자는 사랑방의 선비들이 창호지를 배경으로 감상하던 느낌을 살리려고 했어요. 백색의 백자를 백색의 배경에 둔 채 연필 드로잉처럼 보이도록 했죠. 황금 유물을 찍을 땐 황금이 가진 상징과 장인들의 섬세한 작업들이 어떻게 더 찬란하게 돋보일까를 고민했습니다. 돌을 깎아 만든 조선 말기의 곱돌은 우리가 알고 있던 투박한 멋 이외에도 ‘간결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독일 바우하우스 시대 작품처럼 현대적이죠.”
▷박물관 소장품을 찍는다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요.
“신라 천마총 금관 사진은 박물관에 7년간 요청했고, 교토와 오사카 파리 등 주요 박물관에도 수없이 편지를 쓰고 전화를 했습니다. 복잡한 절차를 통해 겨우 허락을 얻어내도 사진 촬영을 위한 시간은 불과 몇 시간 또는 사나흘 정도였죠. 그 순간을 위해 정교하게 준비해야 했어요. 모조품들을 구해 수많은 배경에 두고 연습 촬영을 얼마나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수장고나 박물관 안에서 숨죽이고 기다린 시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죠.”
구본창은 한국인이 알고 있는 ‘한국의 전통미’를 다시 보게 했다. ‘해학의 미’라고만 여겨졌던 탈은 새침한 색시탈, 호기로운 무사탈처럼 생생하고 다채로운 표정으로 살아났고, 무심한 듯 묶인 보자기의 결은 물 흐르듯 우아한 자태로 존재감을 뽐낸다.
▷영감의 원천은 무엇입니까. 사물을 보는 방법이 있나요.
“관찰과 호기심 아닐까요. 렌즈를 통해 바라볼 때 그 대상에서 영감을 얻습니다. 빛과 배경과 사물이 하나로 맞아떨어지는 순간, 셔터를 누르는 순간 전율을 느낍니다. 사물을 바라보는 방법에 원칙은 없지만 늘 ‘바라볼 준비’를 하고 있는 게 중요하지요. 하나의 작업에만 몰두한 적은 없습니다. 호기심이 많아 여러 작업을 동시에 하다가 그것들이연결되곤 합니다. 우연들이 만나 ‘촉발의 순간’이 찾아온다고 해야 할까요.”
▷평소 루틴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신문 읽기는 평생의 습관입니다. 보통 두 개의 신문을 정독하죠. 내가 미처 몰랐던 것들을 정돈해 볼 수 있고, 스쳐 지나가는 일상의 이야기들을 내 것으로 담을 수 있어 그렇습니다. 해외의 건축·디자인 잡지와 다큐멘터리도 즐겨 봅니다. 그냥 보는 게 아니라 몰입하죠. 타인의 취향을 훔쳐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일 텐데, 아마 호기심이 많아서겠지요? 새로운 것이 늘 궁금하고, 알아가는 과정은 언제나 즐겁습니다.”
▷앞으로 어떤 작업을 더 하고 싶으신가요.
“잊혀진, 혹은 잊혀져가는 사람들을 담고 싶습니다. 함께 살고 있지만 쉽게 잊고 있는 탈북민들이 그렇습니다. 그들이 간직하고 있는 ‘사물’엔 많은 이야기가 담기죠. 고향의 흙을 담아온 사람도, 편지나 일기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어요. 지나간 시간이 새겨진 얼굴과 사물을 함께 보여주는 전시를 기획하려고 합니다. 우크라이나, 가자지구처럼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곳에서 전쟁의 단면만이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들의 모습도 담아보고 싶습니다.”
김보라 문화부 차장/사진=이솔 기자 destinyb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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