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합병(M&A) 승부사, 겁 없는 도전가, 꿈꾸는 모험가…. 김웅기 글로벌세아그룹 회장(73)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는 다양하다. 서울 공덕동 36㎡(약 11평) 사무실에서 500만원 종잣돈으로 시작한 의류무역회사를 38년 만에 6조원 매출의 대기업으로 키워낸 자수성가 이력 때문일 것이다. 김 회장은 스스로를 ‘철저한 사업가’로 표현했다. 돈 못 버는 경영인은 직원에게도 또 국가에도 죄인이라는 게 첫 번째 경영 신념이다.
예술을 사랑하는 기업인이기도 하다. 풀밭에 앉아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던 시골 소년은 ‘글로벌 200대 컬렉터’ 명단에 이름을 올린 저명한 미술 작품 수집가로 성장했다. 한 점 또 한 점 찍어 고통스럽게 완성하는 예술처럼 경영도 끝없이 노력하고 정진해야 한다는 게 김 회장의 생각이다. 글로벌세아가 2022년 서울 삼성역 인근에 문을 연 갤러리 S2A에서 지난 15일 그를 만났다.
▷14년 만에 뵙습니다. 그대로시네요.
“머리만 하얘졌나요.(웃음)”
▷그새 회사는 매출 1조원 중견기업에서 6조원 대기업이 됐습니다.
“전 세계에서 밤낮없이 뛰어준 직원들 덕분이죠. 좋은 기회에 성사시킨 M&A도 폭발적인 성장의 토대가 됐습니다.”
▷‘플라잉맨(flying man)’이란 별명이 있네요.
“해외 진출로 키운 회사다 보니 비행기에서 보낸 시간이 많아요. 한창때는 1년 중 한 달 가까이를 기내에서 보냈어요.
#글로벌세아의 모태인 의류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제조업자개발생산(ODM) 기업 세아상역은 중미·동남아 8개국에서 총 23개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김 회장의 출장이 잦은 이유다. 마지막으로 확인한 항공사 누적 개인 마일리지만 400만 마일에 달한다. 지난달에도 미국 대형 의류 OEM 기업 인수를 타진하기 위해 2주간 로스앤젤레스(LA) 출장을 다녀왔다고 한다.
▷세계 1위인데 또 M&A를 하십니까.
“네. 작년부터 미국 스포츠 의류 제조업체 인수를 준비했습니다. 물류창고가 미국 3개 주에 걸쳐 있는 대형 회사예요. 온두라스, 엘살바도르에서도 대규모 공장을 가동하고 있습니다. 이르면 이달에 최종 사인합니다.”
▷세아상역, 클 만큼 크지 않았나요.
“도전 DNA가 뼛속에 뿌리 박힌 회사죠. 하나를 이루면 다음 목표를 세우고 과감하게 도전해왔습니다. 세아상역은 아직 스포츠·액티브 웨어 부문에 본격적으로 진출하지 않았어요. 인수 대상인 미국 회사는 팬데믹으로 매출이 쪼그라들었지만 수년 내 회복해 연매출 10억달러(약 1조3320억원)를 올릴 것으로 기대합니다.”
▷욕심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현상 유지는 곧 퇴보예요. ‘매출, 영업이익이 떨어지지 않고 유지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그 순간이 추락입니다. 기존에 보유한 사업과 비슷한 사업체를 합쳐 더 큰 파이를 만들고 지배력을 확대하는 볼트온(bolt-on) 전략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글로벌세아는 M&A 시장의 다크호스다. 2006년 인디에프(옛 나산)를 1500억원에 인수한 데 이어 STX중공업(플랜트부문·2018년), 태림그룹(제지·포장산업, 2020년), 쌍용건설(2022년), 전주페이퍼(제지산업·2023년) 등을 차례로 품에 안으며 그룹 외형을 불렸다. 일각에선 시너지 없는 확장이란 비판도 나왔지만 사업다각화를 위한 이종(異種) 업종 진출은 1위 기업의 숙명이라는 게 김 회장의 생각이다.
▷M&A는 피를 말리는 작업이라고들 합니다.
“M&A를 추진할 때는 몸과 마음이 굳고, 불안함에 불면의 밤을 보냅니다. 수면 중에도 절반은 의식이 깨어 있는 상태죠. 과감한 도전과 과도한 욕심은 종이 한 장 차이죠. 냉철한 판단으로 그 경계를 구분하는 게 최고경영자의 역할입니다.”
▷전주페이퍼 인수는 언제 마무리되나요.
“5월에 잔금계약을 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태림페이퍼·태림포장 등 제지 계열사와의 시너지 모색은 물론 해외 공장도 설립해 수출을 확대할 예정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카톤(종이 재질) 박스를 사용하는 회사가 세아상역입니다. 그룹 차원의 원가 절감에 도움이 될 겁니다.”
▷쌍용건설은 공사 수익률이 높아졌습니다.
“PMI(인수 후 통합)팀이 비용 관리를 투명하게 했습니다. 담당 부사장에게 처음 부탁한 것은 60곳이 넘는 국내외 현장의 장비 사용, 인력투입 현황을 명확하게 관리해달라는 거였어요.”
▷해외 건설사업 확대 계획이 궁금합니다.
“세아상역이 진출해 있는 중남미 국가의 대통령들이 자국 내 인프라 확충과 관련해 쌍용건설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머지않아 여러 가지 좋은 성과가 나올 겁니다.”
#김 회장의 인생을 관통하는 두 단어는 도전과 성취다. 바람이 불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바람개비를 들고 뛰어서라도 돌리고 만다는 열정적인 삶을 살았다고 회고한다.
▷다시 20대가 된다면요.
“더 멀리, 더 높이 가고 싶어요. 최근 사업다각화를 했지만 세아상역은 몇십년간 의류업이란 한 우물만 팠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초반부터 더 폭넓은 시각으로 시작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란 생각이 듭니다.”
▷어떤 사업가로 기억되고 싶습니까.
“철저한 사업가요. 사업하는 사람이 돈을 못 벌면 일자리를 만들지 못합니다. 그럼 세수가 적어지고 국가 유지도 힘들어지죠.”
▷결국 국가 걱정으로 이어지네요.
“돈을 벌기 위해 사업을 시작했지만 국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외국에 나가 보면 대한민국의 경쟁력에 더 자긍심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죠. 요즘엔 저출생 문제 때문에 잠이 안 올 정도입니다. 육아휴직을 자체적으로 2년으로 확대하거나 주요 지역별 거점 어린이집을 설치하는 방안 등을 내부적으로 검토해 직원들이 아이를 더 낳을 수 있도록 독려하려 합니다.”
▷은퇴는 언제쯤 계획하십니까.
“은퇴를 생각하면 고인 물이 될 것 같습니다. (웃음) 창업주로서 조언하는 역할만 하는 것도 일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내 인생에 은퇴는 없을 겁니다.”
컬렉터로 유명한 김웅기 회장
김 회장은 김환기 예술세계의 정수라고 평가받는 ‘우주’가 꼭 한국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경매 시작가는 64억원. ‘가격을 따지지 말고 무조건 사야 한다’는 생각으로 응찰하다 보니 최종 낙찰가가 132억원까지 치솟았다. 수수료와 운반비까지 포함해 김 회장이 들인 총금액은 당시 환율 기준으로 167억원에 달한다.
그가 한국으로 꼭 들여와야겠다고 생각한 또 다른 작품은 안중근 의사가 남긴 ‘용호지웅세기작인묘지태’(龍虎之雄勢豈作蚓猫之態: 용과 호랑이의 웅장한 형세를 어찌 지렁이와 고양이의 모습에 비견하겠는가·사진) 유묵이다. 역동적인 필체가 김 회장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4억원대에 시작한 경매 낙찰가는 19억5000만원이었다. 이 작품 역시 돈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안 의사가 중국 뤼순 감옥에서 사형집행을 앞두고 쓴 글”이라며 “죽음을 대면한 31세 청년의 기개가 이렇게 높을 수 있냐”고 감탄했다. 유묵 영인본(확대 복사본)은 제2사옥(S타워) 1층 로비에 걸었다. 수출기업인 만큼 보국(報國)에 대한 안 의사의 신념을 기려야 한다고 생각해서다. 영인본 양옆에는 한글 뜻풀이와 함께 안 의사 사진도 걸어둘 예정이다.
김 회장은 지난 1월 경영철학을 담은 에세이 <세상은 나의 보물섬이다>를 출간했다. 출장 중 틈틈이 기내에서 적은 메모가 도움이 됐다. 인세는 전액 아이티에 설립한 세아학교(S&H school)로 보낼 예정이다.
■ 김웅기 회장 약력
△1951년 충북 보은 출생
△1974년 전남대 섬유공학과 졸업
△1980~1985년 ㈜충방 근무
△1986년 세아교역 설립
△1999년 7000만불 수출의 탑 수상
△2004년 세아상역 회장 취임
△2011년 10억불 수출의 탑 수상
△2015년 지주회사 글로벌세아 출범
△2023년 세계 200대 컬렉터 선정
정리=이미경 기자/만난 사람=이정호 중소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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