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음성에서 구리 잉곳(덩어리)을 만드는 P금속은 지난해 12월부터 월 생산량이 평소의 10분의 1인 100t으로 급감했다. 주원료인 구리 스크랩(부스러기) 수급에 차질을 빚으면서다. 이 회사 대표는 “중국이 스크랩을 싹쓸이하고 있어 물건을 만들 수가 없다”고 호소했다. 산업용 황동봉을 제조하는 중견기업 C사는 매년 100억원 안팎의 영업이익을 기록했으나, 지난해 약 70억 원의 영업손실로 적자 전환했다. 지난해 하반기 이후 시중에 유통되는 스크랩이 부쩍 줄어들면서 불가피하게 웃돈을 주고 매입한 여파다.
전선과 파이프, 건축자재, 전자제품 등의 소재로 쓰이는 구리 합금의 주원료 구리 스크랩이 중국에 무더기로 팔려나가면서 극심한 공급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18일 관세청 및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중국으로 수출된 구리 스크랩은 2만4976t(예상치)로, 올해 1분기 전체 수출량(3만4238t)의 73%를 차지한다. 작년 1분기(1만3141t)와 비교하면 약 2배 증가했다. 지난해 1년간 중국으로 수출된 전체 물량도 6만7043t으로 2020년(1만6340t)의 4배가 넘는다.
전 세계 구리 소비의 약 55%를 차지하는 중국은 스크랩 비중을 계속 늘리는 추세다. 광석 제련을 통해 얻는 구리보다 스크랩을 재활용하면 탄소 배출량이 훨씬 줄어들기 때문이다. 주로 건설 폐자재에서 스크랩을 조달하고 있으나 철거 단계에 이른 건물이 많지 않아 내부 조달도 부족한 상태다.
스크랩은 동네 소규모 고물상(소상)에서 규모가 큰 중상, 대상을 거쳐 구리 제조업체에 공급된다. 중국 수출물량이 늘어나면서 스크랩 유통업체부터 물량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부천의 B사는 “월 매입량이 1500t 정도였으나 지난해 가을 이후 500t으로 줄었다”고 전했다. 김포에선 구리소재 제조업체 3곳이 최근 문을 닫았다. 파주에서 황동봉을 만드는 P사 대표는 “적정 재고가 최소 2000t은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그날그날 들어오는 재료로 겨우 공장을 돌리는 상황”이라며 “생산량도 30% 이상 줄었다”고 전했다.
구리 유통·제조업체들은 중국의 싹쓸이 현상이 발생하는 주된 이유로 제도상의 허점을 꼽는다. 국내 스크랩 유통 초기의 매입 단계에 벌어지는 ‘무자료 거래’를 정상적인 거래로 입증할 방법이 없어서다. 한국동스크랩유통업협동조합 관계자는 “고령자가 리어카를 끌며 수거하는 물량, 소규모 건물 철거 과정에서 나오는 스크랩을 동네 고물상에 팔면서 현실적으로 일일이 세금계산서를 발급할 수가 없다”며 “매입 근거가 없이 스크랩을 팔면 모두 수입으로 잡혀 30%가 넘는 소득세를 물어야 하는데, 중국의 수집상들이 이 틈을 노리고 시세보다 더 좋은 값에 현금을 주고 구리 스크랩을 사들이고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비철금속협회에 따르면 국내에 유통되는 구리 스크랩 물량은 연간 65만t 규모다. 이 중 30~40%는 세금계산서가 붙지 않는 무자료 물량으로 추산되고 있다. 국세청이 이 같은 현실을 감안하지 않고 수시로 강도높은 세무조사를 단행하고 있는 것도 중국 수출을 부추기는 결과를 낳고 있다. 한 중상업체 대표는 “제도 개선을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지만, 국세청이 이는 외면한 채 위장거래라며 수십억원의 세금 폭탄을 때리는 일이 다반사“라며 “차라리 흔적이 남지 않는 중국업체에게 물건을 넘기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업체들이 늘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무자료 거래로 국내에 유통되는 스크랩을 대규모로 사들인 뒤 수출까지 진행하는 중국계 대상들도 등장했다. 평택의 B무역, 화성의 A무역, 부산의 W무역 및 Y금속 등이 중국계로 지목받고 있는 업체들이다. 천안의 국내 대상업체 관계자는 “몇년 전만 해도 중국에서 건너온 보따리상들이 구리 스크랩을 사 가는 정도였으나 지금은 전국적인 조직을 갖추고 대량 수출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전했다.
현금을 주고 사는 무자료 거래는 세금계산서를 끊을 필요가 없어 판매가의 10%에 이르는 부가가치세를 내지 않아도 된다. 18일 기준 kg당 1만800원 선인 동 스크랩 가격을 고려할 때 적게는 1t에서 많게는 수십t 단위로 움직이는 거래량을 따지면 엄청난 금액이 새어나가고 있는 셈이다. 중국 매입업자들이 스크랩 매입에 필요한 현금을 동원하는 과정에서 환치기 수법이나 비트코인을 활용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중국 현지에서 발생하는 13%의 증치세를 줄이기 위해 수출 단계에서 가격이 훨씬 낮은 고철 등으로 신고하는 편법도 광법위하게 퍼져 있다는 게 유통업계의 전언이다. 국내 대상 S사 관계자는 “컨테이너 입구를 고철로 가린 뒤 뒤쪽에는 비싼 구리 스크랩을 싣는 ‘커튼 치기’가 횡행하고 있지만 항구의 검역 단계에서 전혀 적발되지 않고 있다”며 “국내 산업에 꼭 필요한 주요 원자재가 세금도 내지 않고 빠져나가고 있는 만큼 명백한 국부 유출”이라고 우려했다.
중국으로 빠져나가는 구리 스크랩은 지난해 6만7000여t이었지만 1차 정제를 위해 태국, 말레이시아 등을 거쳐 다시 중국으로 들어가는 물량을 합치면 총 10만t에 이르는 것으로 업계는 추산하고 있다. 지난 15일엔 풍산, KBI메탈, 대창 등 국내 주요 구리 가공업체와 유통업계 관계자들이 한국비철금속협회에 모여 중국으로 빠져나가는 막대한 물량의 구리 스크랩에 대한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이승훈 한국비철금속협회 본부장은 “제대로 세금을 납부하지도 않고 중국으로 넘어가는 구리 스크랩이 지난해에만 1조 원 규모에 달한다”며 “경제 안보를 위해 정부 차원의 해결방안이 시급히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이런 상태를 방치하면 국내 170여 구리 제조업의 생태계가 붕괴될 수 있다”며 정부의 대응을 촉구했다.
구리 제조·유통업계는 초기 단계 스크랩 수집 과정에서 거래 관행을 반영해 일정 금액의 매입원가를 인정해 무자료 거래를 양성화하는 ‘원가인정제도’를 도입하거나, 수출 단계에서 검역을 강화해 구리 스크랩의 무분별한 유출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처럼 업계의 우려가 커지고 있지만 정부는 사실상 손을 놓은 채 방치하고 있다. 무자료 거래 양성화의 키를 쥔 기획재정부는 세제의 형평성을 들어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부처간 이견도 있어 구리 업계의 주장을 모두 받아들이긴 어렵다”고 말했다.
이정선 중기선임기자 leewa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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