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75년 만에…고려아연, 영풍과 갈라선다

입력 2024-03-24 18:34   수정 2024-05-13 10:28


재계 자산 순위 28위(16조8920억원)인 영풍그룹의 공동 창업주 일가가 결별을 선언했다. 고려아연 측은 “영풍은 더 이상 동반자가 아니라 시장의 경쟁자”라며 영풍의 ‘성장 지렛대’인 서린상사의 경영권을 되찾아오기로 했다. 1949년 장병희(영풍)·최기호(고려아연) 창업주가 ‘동업자 정신’으로 설립한 영풍그룹은 75년 만에 계열분리를 향한 분쟁에 휘말릴 전망이다.

24일 종합상사업계에 따르면 고려아연은 조만간 서린상사 주주총회를 열어 이사회를 재구성하는 등 경영권을 가져오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영풍그룹의 비철금속을 유통하는 서린상사는 창업 양가의 우호를 상징하는 그룹 핵심 계열사다. 고려아연 측이 66.7%를 보유해 최대주주지만, 지분율 33.3%인 영풍의 장씨 일가에 경영을 일임해왔다. 지난해 매출 1조5290억원, 영업이익 175억원을 기록했다. 고려아연은 경영권을 가져오지 못하는 경우 서린상사와 거래를 끊고 별도 종합상사인 고려상사(가칭)를 설립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어떻게든 유통권을 가져오겠다는 심산이다.

고려아연은 서린상사와의 관계 정리를 시작으로 원료 공동 구매를 포함한 인력·정보 교류 프로그램도 모두 없애기로 했다. 고려아연이 영풍 측 현금원을 말림으로써 본격적인 경영권 분쟁에 대비하려는 포석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영풍은 고려아연 지분 32%를 보유한 최대주주다. 고려아연 최씨 일가 지분율은 15.9%에 불과하다. 현대자동차, LG화학 등의 우호 지분을 합치면 33.2%로 근소하게 우위를 점하고 있지만, 지분 경쟁에 불이 붙으면 결과를 장담하기 어렵다. 영풍그룹의 내홍은 2차전지산업에도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는 사안이다. 글로벌 비철금속제련 1위인 고려아연은 양극재 핵심 소재인 전구체의 중국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LG화학과 합작사도 설립했다. 영풍 관계자는 “동업자 정신을 무시한 일방적인 결정에 단호히 대처하겠다”고 밝혔다.
3代 동맹 깨졌다…'75년 동업자'서 경쟁자로

고려아연이 서린상사 경영권을 완전히 가져오기로 한 것은 방어에서 공격으로 전략을 변경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해석된다. 창업 3세인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 측은 경영에 관여하려는 영풍 측 움직임에 우호 지분을 확보하는 식으로 대응해 왔다. 하지만 이제는 충분한 우호지분을 확보했다는 판단아래 공세를 시작했다는 분석이다.

“인력 공유·원료 공동구매 중단”

고려아연 관계자는 24일 “오랜 내부 회의 끝에 영풍을 더 이상 동업자가 아니라 경쟁자로 규정한다는 방침을 세웠다”고 말했다. 비철금속 분야에서 양보 없는 전쟁을 치를 각오가 돼 있다는 선언이다. 서린상사의 이사회 장악은 이를 위한 첫수다. 서린상사는 창업주 두 집안 간 우호 관계의 상징이다. 서린상사 지분은 최씨 일가와 고려아연을 합쳐 66.7%에 달한다. 그럼에도 대표이사는 지분 33.33%인, 영풍을 이끄는 장씨 일가 창업 3세(장세환)에 맡겼다.

영풍그룹은 고려아연과 영풍이 만든 비철금속 제품을 서린상사를 통해 유통해왔다. 고려아연 관계자는 “그동안 서린상사는 사업 영역이 겹치는 아연, 황산 제품 유통에서 마진이 높은 계약 건은 영풍 제련소가 만든 제품으로, 마진이 낮은 계약 건은 고려아연 제련소가 만든 제품으로 거래하는 등 불합리한 결정이 많았다”고 말했다. 앞으론 고려아연 위주로 서린상사의 영업 행태를 재편하겠다는 것이다. 영풍 측은 이에 대해 “전혀 사실이 아니다”며 “경영 분리를 위해 빌미를 만들고 있는 것”이라고 반박했다.

서린상사가 영풍 계열 알짜 회사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번 조치로 장씨 일가는 상당한 타격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 매출 1조5290억원, 영업이익 175억원을 기록한 서린상사를 통째로 빼앗길 위기에 있기 때문이다.
창업 3세 때 무너지는 동맹

그동안 영풍은 고려아연과 원료도 공동 구매해왔다. 이를 통해 규모에 의한 ‘거래협상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비철금속 원료를 공동으로 구매하고 각자 생산해 다시 서린상사를 통해 공동판매하는 마치 한 회사와 같은 공동경영 구조였다.

영업 분리로 협상력을 잃는다면 영풍측에 큰 타격이 될 수 있다. 앞으로 고려아연은 회사 내 영풍 측 파견 인력도 돌려보낼 예정이다. 그동안 양사 협업을 위해 고려아연 회사내에는 영풍측의 직원들이 파견돼 함께 일해왔는데 이들을 모두 영풍으로 돌려보내겠다는 것이다. 정보기술(IT) 시스템 등 공동으로 사용하던 각종 회사 운영 프로그램도 따로 쓸 방침이다. 업계에선 비철금속 시장 내 영풍의 입지와 실적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보고 있다.

고려아연의 아연 제련량은 국내 공장(64만t)과 호주 자회사(24만t)를 합쳐 88만t 수준이다. 지난해 영풍의 아연 생산량은 32만t에 그쳤다. 비철금속업계 관계자는 “고려아연과 결별한 영풍은 원료 구매 등 바잉파워에서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영풍그룹 지배회사인 영풍은 지난해 매출 3조7617억원, 영업손실 1698억원을 기록했다. 영풍 측 주요 계열사인 코리아써키트도 321억원 손실을 봤다. 게다가 영풍의 석포제련소는 현재 소송, 조업정지 처분 등으로 아연을 감산하는 상황이다. 예전엔 고려아연 계열 제련소를 활용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180도 달라졌다. 업계 관계자는 “영풍의 조업 정지 처분과 감산 등으로 함께 원료 구매와 제품 판매를 하는데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배터리 투자에 대한 시각차 ‘뚜렷’

영풍 측은 고려아연의 경영 분리 시도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최대주주가 회사 경영에 관여하는 것은 당연한 데다 고려아연이 무리하게 우호 지분을 늘렸다는 것이다. 영풍 관계자는 “모든 갈등은 이사회 구성 등 경영권이 고려아연의 지분구조와는 완전히 괴리돼 있다는 것에서 비롯됐다”고 말했다. 또 “경영에 간섭한다는 고려아연의 주장과 달리 간섭을 한적도 없고 이사회 구조상 할 수도 없다”며 “회사를 장악하기 위해 표면적 명분을 내세우고 있는 것일 뿐”이라고 했다. 지분은 영풍 측이 많은데 최윤범 회장 등 최씨 일가가 독립적인 경영권을 주장하는 것은 주식회사의 취지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갈등의 근간에는 ‘신사업 진출에 대한 시각차’도 있다. 고려아연은 2차전지 소재, 리사이클링 등 신사업에 적극적으로 투자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투자를 위해 차입을 늘리고 배당을 줄이는 것도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반면 영풍은 고려아연이 무리한 리스크를 피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배당을 줄이는 것에 대해서도 강하게 반대하고 있다.

성상훈/김우섭 기자 upho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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