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결권 위임 대행업체 로코모티브에 3월은 ‘행복한 지옥’이다. 국내 주요 기업의 정기 주주총회를 앞두고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일거리가 쏟아져서다. 전직 보험·카드 영업 직원 출신으로 꾸린 이 회사의 ‘외인부대’는 의결권을 위임받기 위해 전국의 주주들을 찾아다닌다. 문전박대를 당하기 일쑤고 “주가가 왜 이 모양이냐”는 애꿎은 질타를 받기도 한다. 이태성 로코모티브 대표는 “의결권 위임장을 받기 위해선 삼고초려는 기본”이라며 “기업 분쟁이 급증하다 보니 올해는 위임장을 받아야 할 주주가 작년보다 두 배 이상 늘었다”고 말했다.
26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최근 한 달간 올라온 ‘소송 등의 제기·신청’(경영권 분쟁 소송) 공시는 81건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같은 기간(56건) 대비 44.6% 급증했다.
올해 주총에선 특히 주요 상장사에 대한 행동주의 펀드의 공격이 두드러졌다. 삼성물산, JB금융지주, KT&G 등이 대표적 사례다. 고려아연, 금호석유화학 등 가족이나 공동 창업자 간 분쟁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경영권 분쟁은 의결권 위임 대행업체에는 호황을 의미한다. 이들은 주총을 앞두고 주주들을 찾아다니며 주총 결의 사안을 설명하고 의결권을 위임받는 역할을 한다. 업계에선 위임장을 받는 작업을 ‘수박을 돌린다’고 표현한다. 2015년 한 회사 직원들이 계열사 간 합병안 통과를 위해 수박을 들고 주주들을 찾아다니며 합병 당위성을 설득한 데서 비롯된 은어다.
현재 국내에서 영업 중인 의결권 위임 대행업체는 50여 곳인 것으로 알려졌다. 2017년 섀도보팅 제도가 폐지되면서 의결권 위임 대행시장이 급격하게 성장했다. 최근엔 업체들이 세분화·전문화하는 분위기다. 비사이드코리아, 헤이홀더, 액트 등은 주로 소액주주와 행동주의 펀드의 의결권 위임을 대행한다. 로코모티브와 지오파트너스 등은 기업 측의 일을 돕는다.
의결권 위임 대행 경쟁이 과열되며 부작용도 나타나고 있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불쑥 집으로 찾아오는 대행업체 직원들 때문에 당황하는 주주가 적지 않다. 경영권 분쟁 중인 기업의 주식을 소유한 한 주주는 “밤늦은 시간에 웬 여성이 찾아와 다짜고짜 문을 두드려 깜짝 놀란 적이 있다”고 했다.
다른 주주는 “민감한 개인정보인 집 주소를 얼굴도 모르는 대행업체 직원이 알고 있다는 점이 께름칙하다”고 말했다. 주주명부에는 주주 이름과 소유 주식 수, 집 주소 등이 적혀 있다. 회사 측은 물론 소액주주도 주주명부 열람권이 있다. 이 명부를 받아 대행업체에 맡겨 의결권을 위임받는 건 불법이 아니다. 다만 일각에선 무분별한 주주명부 열람 청구가 개인정보 유출 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대행업체 간 경쟁이 치열해지자 일부 업체는 불법적인 방법을 동원하기도 한다. ‘어둠의 경로’로 주주들의 전화번호를 입수해 전화로 주주를 설득하는 업체도 등장한 것으로 전해진다. 비정상적인 방법까지 동원되자 업체들 사이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나온다. 한 의결권 위임 대행업체 관계자는 “오후 9시 이후에는 가정 방문을 금지한다든지, 주주의 개인 전화번호를 불법으로 입수해 연락하면 처벌하는 등 관련 규제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박종관/하지은 기자 pj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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