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면 여야 피차간에 크고 작은 약점과 실착이 많았다. 흠집의 성격과 무게를 놓고 보면 야당 쪽이 더 큰 타격을 받았어야 했다. 잇따른 입법 폭주와 장관 탄핵 남발, 김남국 의원의 코인 난장, 의원 수십 명이 연루된 돈봉투 사건, 이재명 대표의 ‘불체포특권 포기’ 약속 폐기, 공천 과정의 숱한 무리수 등은 정당 민주주의 퇴락과 공당의 도덕적 파탄이라는 비판을 받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하지만 윤 대통령의 불통 논란, 이태원 참사·김건희 여사에 대한 특검 요구, 후쿠시마 오염처리수 방류에 대한 친일 공세, 해병대 채수근 상병 순직 논란, 정당한 사법 절차를 검찰 독재로 되받아치는 술수 등의 공세가 더 먹혔다. 참과 거짓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극단적 편향성이 눈과 귀를 막았다. 정부가 경제 활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백방으로 뛰고 있지만 그 효과는 서서히 나타날 수밖에 없다. 당장 고단한 사람들은 세상이 한번 뒤집히기를 원한다. 그 대안이 민주당 아니라 조국혁신당, 진보당이라도 상관없다. 그러니 사과와 대파값이 서민들의 공적이 되고 ‘정권 탄핵’ ‘정치 보복’ ‘경제 폭망론’ 같은 탁류가 선거판을 휘몰아치는 것이다.
‘조국 사태’에서 ‘이재명 방탄’에 이르기까지 지난 5년간 우리나라 정치 윤리와 규범은 퇴락의 길을 걸어왔다. ‘조국 수호-정치검찰 아웃’ ‘대장동 몸통은 이재명이 아니라 윤석열’이라는 반동적 주장에 늘상 40%의 지지가 뒤따랐다. 한 차례 격한 파동에 사방으로 흩어졌던 물고기들이 언제 그랬느냐는 듯 다시 몰려다니는 것처럼, 많은 사람이 거짓 선동과 구호에 환호하고 기꺼이 현혹된다. 중국을 향한 이 대표의 ‘셰셰’ 발언은 결코 실언이 아니다. 중국을 향한 공개적 충성맹세에 가깝다. 중국이 “한국에서 딱 하나뿐인 현명한 사람”으로 장단을 맞춰주니 그저 부끄러움은 우리들 몫일 수밖에. 지지자들은 이런 발언의 맥락을 제대로 규명하지 않는다. 우리 미래에 중국 따위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대로 가다간 아르헨티나처럼 될 수 있다”는 얘기도 마찬가지. 이 대표는 상황과 비교대상이 맞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같은 주장을 반복한다. 그간의 경험에 비춰볼 때 이런 억지를 부려도 충분히 통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법 리스크를 달고 다니는 두 사람은 이번 총선에서 기어이 정치적 생환의 기회를 잡았다. 법과 도덕을 뛰어넘는 희대의 생존 서사는 피고인이 판사에게 대놓고 불출석을 요구하는 상황을 만들어냈다. 급기야 수감 중인 송영길이 두 사람을 빌미로 ‘기회의 불공정’을 외치기에 이르렀다. 도덕률과 법치가 무너지니 사회 전체가 ‘깨진 유리창’ 신세로 전락한다. 그 틈새로 종북 좌파와 파렴치 범죄자들이 바람처럼 숭숭 불어닥친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정사(正邪), 사안의 핵심과 곁가지를 구분하는 본말(本末), 무엇이 우선이고 나중인지를 분별하는 주종(主從)이 모두 흔들린다. 피해는 결국 거짓 선동과 공짜 구호에 속아 넘어간 국민들 차지다. 이 대표가 언급한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딱 그런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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