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중국은 지난해 9월부터 유럽연합(EU)에서 전기차 관련 보조금 조사를 받고 있다. 중국이 2009년부터 13년간 자국 기업에 보조금을 지급해 이들 업체가 유럽에 전기차를 ‘덤핑 수출’하고 있다고 EU가 문제를 제기하면서다. EU 역시 보조금 문제에서 자유롭진 않다. 독일은 2016년부터 8년간 전기차 구매자에게 보조금을 지급했고, 프랑스도 올해부터 전기차 보조금 지급에서 EU에서 생산한 차량을 우대하고 있다. 보조금 없이는 글로벌 통상 무대에서 살아남기 힘든 ‘쩐의 전쟁’ 시대가 온 것이다.
29일 세계은행에 따르면 EU(29%) 미국(27%) 중국(18%) 등 3개 권역이 전 세계 보조금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개수 기준으로 약 75%에 달한다. 캐나다와 호주가 각각 5%, 기타 국가가 약 15%였다. 과거 보조금이 자국 산업을 보호·육성하기 위한 신흥국의 도구였다면 이제는 첨단산업 격차를 벌리기 위한 강대국의 정책이 된 것이다.
보조금 전쟁의 서막을 알린 것은 중국이다. 2009년부터 2022년까지 14년간 신에너지차 보조금을 통해 전기·하이브리드차 생산 기업과 소비자에게 총 1600억위안(약 30조원)을 투입했다. 이에 미국도 2022년 IRA를 시행해 맞불을 놨다. 2032년까지 총 105억달러(약 14조1500억원)를 지원하기로 했다. 중국 자본이 들어간 차량과 부품은 보조금 지급 대상에서 제외했다.
반도체도 중국이 먼저 보조금 정책을 시행하고 미국이 뒤따르는 모양새다. 중국은 1·2차 국가집적회로산업투자펀드(대기금)를 통해 2014년부터 총 3429억위안(약 63조7000억원)을 조성했다. 미국은 2022년 시행한 반도체지원법을 통해 반도체 산업에 2027년까지 총 527억달러(약 71조원)를 투자하기로 했다.
미·중은 반도체 보조금을 더 확대할 계획이다. 지나 러몬도 미 상무장관은 지난달 “제2반도체법이든 뭐든 또 다른 투자를 지속해야 한다”고 했다. 중국은 1·2차에 이어 2000억위안(약 36조원) 규모의 3차 대기금을 모을 계획이다.
강대국들이 시작한 보조금 전쟁은 신흥국에도 번지고 있다. 인도는 지난해부터 반도체 제조 기업에 100억달러(약 13조원) 규모의 보조금을 지원하기 위한 신청을 받고 있다. 라구람 라잔 미국 시카고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파이낸셜타임스(FT) 칼럼을 통해 “보호무역주의는 전염성이 있다”며 “선진국이 국경 개방에 등을 돌리면서 가난한 국가들도 이에 굴복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반도체 기업에 이렇다 할 보조금을 주지 않고 있는 한국에는 위기 상황이라는 진단이 나온다. 세계 각국의 보조금 경쟁이 불붙은 결과 지난해 한국에서 순유출된 기업 투자자금은 622억달러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순유출액은 내국인 해외직접투자(ODI)에서 외국인직접투자(FDI)를 뺀 금액이다.
류성원 한국경제인협회 산업혁신팀장은 “정부에서 하루빨리 반도체 등 첨단산업에 보조금을 지급해야 기업 이전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인엽/김세민/박의명 기자 inside@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