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가 환자를 치료할 때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생기는 상호 신뢰 관계를 심리학 용어로 라포르(rapport)라고 한다. 라포르가 좋은 의사·환자 관계가 되면 환자는 감정적 지지를 받아 심리적 안정감이 증진된다. 자신의 상태와 치료 방법에 대해 더 잘 이해하고 협력할 가능성이 커져 치료 효과가 높아진다고 알려졌다. 가짜 약인 플라세보 효과조차도 라포르가 좋은 경우 훨씬 더 효과가 높다.
의료 시스템이나 정책도 의사·환자 간 라포르를 높이는 방향으로 설정해야 궁극적으로 의료비 낭비를 줄일 수 있다. 의료 시스템과 관련한 일반인의 적잖은 불신은 병원에 고용돼 일하는 의사의 문제가 아니라 정책이나 제도의 허점, 병원 소유 자본의 문제일 수 있는데도 의사·환자 간 라포르를 훼손한다.
질병에 오래 시달리면 불안과 불신이 커져 합리적인 치료 방침을 따르지 않고, ‘닥터 쇼핑’을 하거나 불필요한 검사를 반복해 의료비 낭비를 초래할 수 있다. 건강에 대한 불안이 증가하면 여러 사회적 비용도 늘어난다. 건강기능식품 시장은 건강에 대한 불안에 기반한 대표적인 시장이라고 부를 만한데, 2022년도 기준으로 시장 규모가 6조1498억원에 달했다. 같은 해 국민건강보험공단의 보험 급여비 지출 규모 83조1700억원과 비교할 때 결코 작지 않다. 건강기능식품 시장 규모가 환자 질병 치료 비용의 7.3%나 되기 때문이다.
사회학 용어에도 라포르의 확장된 개념인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이라는 개념이 있다. 이 용어는 사회 내에서 인간관계를 통해 형성되는 신뢰, 상호 도움, 협력 등의 가치로 정의된다. 사람 사이의 네트워크와 연결, 사회적 상호작용, 지역사회의 문화 등을 포함한다.
사회적 자본은 경제적 자본, 인적 자본과 함께 사회 발전과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회적 자본이 잘 발달하면 사회 내의 신뢰와 협력이 높아지며, 이는 사회 전반의 발전과 안정에 좋은 영향을 미친다. 사회적 자본이 부실하면 불필요한 사회경제적 비용이 증가해 비효율적인 사회가 된다. 실제 자본의 역할을 하기에 ‘capital’이라는 용어를 쓰는 것이다.
현재 진행 중인 의료대란은 의료계가 정부 의료 정책에 대한 신뢰가 없는 상태에서 시작된 탓에 사회적 자본 부재라는 고비용을 치르고 있다. 사태가 궁극적으로 의사·환자 간의 라포르를 해치는 과정인 만큼, 앞으로 더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이 소모될 수도 있다. 이 모든 게 만우절의 ‘하얀 거짓말’이면 좋겠다.
조정진 한림대 동탄성심병원 교수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