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 삼익쌀통 들여놨어요?"
1단부터 3단까지 버튼을 눌러 쌀을 내려받았던 '삼익쌀통'은 1980~90년대 중산층의 상징이었다. 쌀 포대 안에서 쌀벌레가 생기지 않도록 쌀통에 보관을 해야 한다는 것도 당시로선 새로웠고, 단수에 따라 알아서 쌀 양을 조절해준다는 점도 획기적이었다. 이 삼익쌀통을 만들던 회사가 바로 지금의 삼익THK(당시 삼익공업)다.
1960년 삼익공업사로 창업한 이 회사는 산업용 부품의 거친 면을 갈아주는 '줄' 생산으로 유명했다. 창업주인 고(故) 진우석 명예회장은 줄·쌀통으론 더 이상의 성장이 어렵겠다고 판단하고 1991년 일본 THK와 기술제휴를 맺었다. THK가 생산하던 LM(linear motion·직선운동)가이드의 국내 생산을 시작한 계기다. 1984년 THK의 대리점 사업을 하다가 아예 투자를 받아 공장을 지은 것이다. LM가이드는 물체가 직선 방향으로 부드럽게 흔들림 없이 움직이도록 하는 데 쓰이는 공장 자동화 부품이다. 미세 공정이 요구되는 반도체·배터리 공장에서 주로 사용한다.
두 회사는 40년 이상 파트너십을 이어온다는 점 외에도 '3대 가족경영'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삼익THK는 창업주의 아들인 진영환 회장과 손자인 진주완 사장이 각자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진 사장은 진 회장의 조카로 창업주의 장손이다. 2022년 5월 사장에 취임했다. THK 창업주의 손자인 테라마치 타카시 사장은 올해 1월 대표이사에 취임했다.
진 사장의 명함에는 최고목적책임자(CPO·Chief Purpose Officer)라고 적혀있다. 회사가 추구하는 목적, 가치에 맞춰 경영을 하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다. 줄, 쌀통, LM가이드에 이어 최근엔 직교로봇 등 반도체용 로봇을 생산하는 기업으로 변모해온 비결이 궁금했다. 어떻게 모두 다 성공적으로 시장에 안착할 수 있었냐는 질문에 진 사장은 "줄이 세상에 주는 가치가 있는데 세상이 변하면 회사도 다른 제품으로 가치를 줘야 하는 것"이라며 "회사 안에 창업정신이 내재돼있다"고 답했다. 그는 이어 "모든 제품이 다 성공한 건 아니었다"며 "휴대용 가스렌지, 전자 자, 호닝파이프, 실린더, 라이터용 압축착화소재 등 알려지지 않았을 뿐 실패했던 사례는 많다"고 덧붙였다. "끊임없이 도전하는 창업정신으로 세상에 가치를 주는 제품을 만들다보니 여기까지 온 것"이라는 설명이다. 삼익THK의 지난해 매출액은 3164억원, 영업이익은 69억원이었다.
LM가이드, 정밀 볼 나사 등을 생산하던 삼익THK는 물류 로봇, 반도체 로봇 등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반도체용 웨이퍼를 이송하는 자동화 로봇과 모듈을 주력 상품으로 키운다는 계획이다. 또 LM 모터를 활용한 워크반송시스템(VTS), LM가이드에 부착하는 IoT 예지감지기술과 스마트팩토리 검사 시스템 같은 소프트웨어도 개발 중이다. IoT 예지감지기술은 LM 기술로 감지한 진동을 인공지능(AI) 알고리즘으로 분석한 뒤 수치화해 손실 여부 등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밖에도 삼익THK는 글로벌 협동로봇 1위 기업인 유니버설로봇(UR)과 협약을 맺고 국내서 UR의 센서, 모듈 등을 공급하고 있다. 또 UR의 자회사인 미르와 함께 자율주행로봇(AMR)도 공급 중이다.
삼익THK와의 40주년을 맞아 최근 방한한 테라마치 타카시 THK 사장도 인터뷰에 동석했다. 그는 3대째 가업을 물려받은 이유를 묻는 질문에 “대학 때 기계공학을 전공하면서 로봇, 인공지능(AI), 인공위성 등을 공부했는데 당시 고민하던 영역이 다 회사에서 다룬다는 걸 알고 큰 흥미를 느꼈다”고 답했다.
1971년 테라마치 사장의 조부가 창업한 THK는 도쿄증권거래소에 상장돼있다. THK는 LM가이드 세계 1위 회사지만 주요 제품 중에는 전기차용 부품인 액츄에이터도 있다. 전류, 유압 등의 물리적 상태를 바꿔주거나 흐름을 조절할 때 사용하는 부품이다. 이 부품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THK는 전기차를 완성했다. 무려 1년7개월 동안 공을 들여서다. 전기차를 자동차 박람회 때 콘셉트카 형태로 공개한 데 대해 판매계획을 묻자 테라마치 사장은 "전기차를 팔 생각은 없다"고 했다. "액티브 서스펜션, 액츄에이터 등 우리가 자신하는 부품들이 완성차에선 어떻게 구동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제작한 것일뿐"이라는 설명이다.
THK는 지난해 3519억3900만엔(약 3조1355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매출 1위 제품은 LM가이드(47%)이고 액츄에이처가 19%로 2위, 볼 스크류(14%), 크로스롤러링(6%), 볼 스플라인(5%), 셰리컬 플레인 베어링(3%) 등의 순이다.
테라마치 사장은 또 "삼익THK의 가장 큰 장점이자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스피드 경영"이라고 했다. 그는 "한국의 특성일 수도 있는데 새로운 분야에 역동적으로 도전하고 빠르게 추진하는 능력이 탁월하다"며 "지금까지는 양사가 부품 공급, 기술이전 수준의 파트너십이었지만 앞으로는 솔루션 비즈니스로 다양한 교류를 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단순히 LM가이드 부품을 공급해주는 데서 한 발짝 나아가 인적 교류까지도 고려한다는 설명이다. THK가 제조하는 무빙마그넷 등 반도체 자동화로봇의 부품과 기술을 다양한 방식으로 협업할 계획이다.
삼익THK는 KIST와 의료용 고관절 복합체 보행보조 로봇을 함께 개발 중이다. 내년 하반기에는 제품으로 출시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신규 사업을 위해 계열사 삼익매츠벤처스를 통해 테크 스타트업도 발굴·투자하고 있다. 스마트팩토리, 로봇 안전기술, AI, 빅데이터 등 사업과 연관된 기술력을 가진 기업에 투자 중이다.
양사는 앞으로 반도체용 자동화 로봇 기업으로 도약하겠다는 목표를 강조했다. THK는 ‘장인정신(모노쯔쿠리)’을 앞세워 로봇 부품 제조업에 서비스를 더하겠다는 계획을, 삼익THK는 스마트팩토리용 로봇 사업 확장 계획을 세웠다.
진 사장은 “일본 THK와 앞으로도 돈독한 파트너십을 유지하면서 함께 성장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테라마치 사장은 “제조서비스업이라는 독특한 사업 형태로 어떻게 성장해가는지 지켜봐달라”고 했다.
민지혜 기자 spo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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