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식 칼럼] '민주팔이'들의 민주주의 파괴

입력 2024-04-01 17:51   수정 2024-04-02 00:28

민주주의는 태생적으로 자기 파괴적인 속성을 갖고 있다. 장 자크 루소의 ‘일반의지’는 이상일 뿐, 파편화되고 이기적인 개인을 합의로 이끌어 내는 과정에서 선혈이 낭자하고 파탄으로 끝나기 일쑤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종주국이라는 미국에서도 목격하는 그대로다. 팬덤에 휘둘리고 선거 결과 자체도 인정하지 않게 되면서 극단의 양극화로 치닫는다. 규범은 무너지고, 자기 파괴적 역동성만 난무하며 ‘민주주의 덫’에 갇힌 꼴이다.

그래서 윈스턴 처칠은 ‘민주주의는 최악의 제도’라고 했다. 다만 처칠은 “우리가 시도했던 다른 통치 방식을 제외하면…”이라는 전제를 달았다. 민주주의는 어쩔 수 없는 숙명이란 얘기다. 단, 조건이 필요하다. 벤 앤셀은 <정치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민주주의는 승자와 패자 사이의 소리 지르기 시합으로 변질되면서 사회를 양극화시킨다”며 “칼날 위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고 했다. 균형은 제도와 규범을 통해 이뤄져야 하고, 공정과 신뢰가 깔려야 한다. 대의민주주의의 근간인 선거는 더욱 그래야 한다. 물론 조지프 슘페터가 “국민의 표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적인 싸움을 통해 결정을 내리는 권력을 얻는 것”이라고 민주주의를 현실적으로 정의한 것처럼 선거는 속성상 치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공정성과 규범에 대한 신뢰성이 깨지면 케네스 애로의 지적대로 민주적인 투표가 극심한 혼돈, 독재로 이어질 수 있다.

‘4·10 총선’ 과정을 보면 이를 적나라하게 확인할 수 있다. 막말, 검증 부실에 따른 무자격 후보들은 투표를 통해 걸러낼 수 있다고 치자. 보다 근본적인 위험은 제도가 뿌리째 흔들리면서 절차적 민주주의조차 훼절되고 있다는 것이다. 제도는 한 번 무너지면 왜곡된 채로 영속성을 지니는 위험성이 있다. 4년 전 태어난 괴물 위성정당은 이번에도 비례대표제를 비틀었다. 여야를 막론하고 지역구를 옮겨 다니며 쇼핑하는 현상이 더 확대된 것도 역시 대의민주주의 훼손이다. 더불어민주당 공천 과정을 보면 제도의 안정성은 시궁창에 박혔다. 비명계를 쳐내기 위해 특정 지역구에선 개딸들이 많이 참여할 수 있도록 경선 룰을 마구 바꿨다. 왜 그래야 하는지 설명도 없다.

지난해 이재명 대표 체포안이 가결되자 개딸들이 ‘반동분자’ 색출에 나서면서 살벌한 인민재판이 벌어지더니 이번 공천을 통해 소탕은 끝내고 ‘이재명의 민주당’ 틀을 갖췄다. 정당의 공적 기능은 사라지고 대표에 대한 충성심이 공적 절차, 규범보다 더 강한 무기와 기준이 돼 버렸다. 배타적이고 극악한 팬덤에 의존해 직접민주주의로 치닫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지도자를 따르며 ‘무오류성’을 떠받드는 현상을 보며 파시즘의 으스스함을 떠올린다. 특정 집단의 과잉 대표성은 꼬리가 몸통을 흔들어 대의민주주의를 파괴한다. 조국당이 1호 공약으로 한동훈 특검법을 내세우고, 김건희 종합특검법과 윤석열 대통령 관권선거 국정조사를 추진하겠다는 것은 노골적인 보복이다. 당명에 이름을 넣고, ‘비법률적 명예 회복’을 운운하는 것 자체가 정당 사유화 선언이다. 역시 정당의 공적 기능은 안중에 없다. 한국 정치에 부족적 민주주의의 유령이 짙게 떠돈다.

탄핵 선동도 점입가경이다. 탄핵은 헌법·법률 위반이 있어야 한다. 민주당 은 윤석열 대통령 취임 두 달 뒤부터 탄핵을 거론했다. 대선이라는 중차대한 제도를 아무렇지 않게 형해화하려는 것이다. 국민을 내세우지만, 윤석열 후보를 찍은 과반은 국민이 아닌가. 대통령이 불통, 오만 이미지를 자초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야당이 이를 고리로 비판할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정치적 영역이지 법적 영역은 아니다.

조국 당대표는 4년 중임제 개헌을 통한 대통령 임기 단축과 ‘데드덕(dead duck)’, 즉 식물대통령을 공공연히 떠든다. 범야권이 200석을 넘기면 국회 차원의 탄핵은 현실이 될 수 있다. 지난 대통령 탄핵으로 우리 사회는 엄청난 갈등의 골이 파였는데도 탄핵을 주장하는 건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격이다. 나라가 두 동강 나든 말든 괜찮다는 건가. 자숙해도 모자랄 범법 혐의자들이 당을 한낱 개인 전유물로 만들면서 제도를 조롱하고 있다. ‘민주팔이’들에 의해 민주주의가 이렇게 파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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