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04월 02일 15:27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고(故) 임성기 한미약품 창업회장의 장남인 임종윤 전 한미사이언스 사장과 차남 임종훈 전 한미약품 사장이 글로벌 사모펀드(PEF) 운용사 KKR과 손잡는다. KKR과 함께 한미약품그룹 지주사인 한미사이언스의 과반 지분을 확보해 경영권 분쟁의 종지부를 찍겠다는 구상이다.
2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장·차남은 한미사이언스 지분 51% 이상을 확보하기 위해 KKR과 협력안을 막바지 협상 중이다. 양측은 KKR이 주체가 돼 추가 지분을 사들이되, 장·차남의 경영권을 보장해주기로 의견을 모으고 있다.
KKR은 우선 오너 일가를 제외한 개인 최대주주인 신동국 한양정밀 회장(지분율 12.15%)과 지난달 28일 열린 주주총회에서 막판 임종윤 전 사장의 우군으로 합류한 사촌들(약 3%) 지분을 프리미엄을 얹어 받아주기로 했다. 상속세 재원 마련이 필요한 장·차남 지분도 일부 사올 것으로 보인다.
장·차남과 KKR은 경영권 분쟁을 벌인 모친 송영숙 한미약품 회장과 장녀인 임주현 부회장 모녀와도 물밑 접촉에 나섰다. OCI그룹과의 통합이 무산되면서 상속세 재원 마련 방안이 없어진 모녀 측도 일부 지분을 매각을 고려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모녀 측이 지분을 넘기면 장·차남과 KKR은 어렵지 않게 과반 지분을 확보할 수 있다. 모녀 측과의 협상이 결렬되면 일반 주주들이 가진 한미사이언스 지분을 공개매수하는 방안도 거론된다.
현재 장·차남과 특수관계인이 보유한 한미사이언스 지분은 28.42%다. 장·차남과 KKR이 한미사이언스 과반 지분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KKR이 단일 최대주주에 오를 가능성도 있다. 장·차남 측은 KKR이 지분율상 단일 최대주주에 오르더라도 자신들의 경영권을 보장받겠다는 계획이지만, 업계에선 사실상 KKR로의 경영권 매각과 다름없다는 시각이 짙다.
KKR의 입장을 듣기 위해 수 차례 연락을 시도했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장·차남 측 관계자는 "펀드와 관련해선 할 말이 없다"고 했다.
상속세에 흔들린 한미약품… 결국 사모펀드 손으로 가나
지난달 28일 열린 한미사이언스 주주총회에서 시장의 예상을 깨고 장·차남인 임종윤 전 한미사이언스 사장과 임종훈 전 한미약품 사장 측이 승리했지만 5000억원에 달하는 상속세 문제로 시작된 한미약품그룹 경영권 분쟁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있다. 장·차남과 특수관계인이 보유한 한미사이언스 지분이 28.42%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신동국 한양정밀 회장을 비롯해 장·차남이 포섭해놓은 우군들이 돌연 마음을 돌리면 경영권은 언제든지 흔들릴 수 있다. 장·차남이 KKR과 손잡고 한미사이언스 과반 지분 확보를 서두르는 배경이다. KKR, 주총 표대결 승리의 숨은 공신?
2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장·차남 측은 모친인 송영숙 한미약품 회장과 누이인 임주현 부회장과의 경영권 분쟁 초반부터 조 단위 현금을 보유한 글로벌 사모펀드(PEF) 운용사와 손잡고 지분확보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는 방향을 구상해왔다. 당시엔 미국계 PEF인 베인캐피탈이 유력한 협상 대상자였다. 다만 글로벌PEF들이 정관상 경영권 분쟁이 진행 중인 투자처엔 투자할 수 없다는 규정을 두고 있어 속도를 내진 못했다.이후 주주총회에서 장·차남이 승리하고 모녀 측의 파트너였던 OCI가 경영권을 포기하며 분쟁이 종식되자 글로벌 PEF들의 물밑 접촉이 이어졌다. 그동안 한국에서 행보가 잠잠했던 KKR이 베인캐피탈 대비 유리한 조건을 제시하면서 승기를 잡았다. KKR은 장·차남의 경영권을 보장해주는 등 가장 좋은 조건을 제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달 열린 주총에서 신 회장을 비롯해 장·차남의 사촌들을 포섭한 데도 KKR의 역할이 컸다. 신 회장과 사촌들은 향후 KKR이 상당한 프리미엄을 얹어 지분을 사주는 조건으로 장·차남 측에 힘을 실어준 것으로 알려졌다. IB업계 관계자는 "사실상 주총의 승패를 결정한 사촌들 입장에서도 영향력 없는 소액주주로 남느니 장·차남에 붙어 지분을 비싸게 팔고 나오는 게 이득이라고 판단해 막판에 마음을 돌렸을 것"이라며 "다만 장·차남 측에서 베인캐피탈의 마지막 제안을 받아보자는 의견도 있어 장·차남의 재무 동반자가 바뀔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신 회장과 사촌들 지분을 사들이더라도 장·차남과 KKR의 지분율은 40%에 불과해 과반 지분을 확보하기 위해선 모녀 측 지분을 사오거나 장내에서 지분을 추가로 매집해야 한다. 모녀의 협력 없이 장내 지분 매입만으로는 과반 지분 확보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국민연금(7.66%)을 제외한 한미사이언스 소액주주 지분은 16% 수준이다. 일반 주주의 60% 이상이 장·차남 측에 지분을 팔아야 과반 지분을 확보할 수 있다.
장·차남이 주총이 끝난 뒤 모녀 측에 화해의 손길을 먼저 내민 것도 이런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행동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OCI그룹과의 대주주 지분 맞교환을 통해 상속세 재원을 마련하려 했던 모녀 입장에서도 상속세를 내기 위해선 일부 지분이라도 팔아야 하는 상황이다. 모녀가 납부해야 할 잔여 상속세는 1700억원에 달한다.
한미약품그룹, 사실상 펀드에 넘어가나
당장 현금이 부족한 장·차남도 상속세를 내기 위해 지분 일부를 KKR에 넘길 가능성이 있다. 장·차남이 내야 하는 남은 상속세는 9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장·차남은 지금까지 한미사이언스 주식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상속세를 분납해왔지만 이미 담보대출액 2700억원에 달해 한계에 이른 상황이다. 임종윤 사장의 개인회사인 DXVX와 코리그룹 지분 일부를 매각하는 방안도 거론됐지만 적정 기업가치를 인정받기까진 난관이 컸다.일각에선 장·차남이 명목상 경영권을 보장받긴 했지만 사실상 KKR에 한미약품그룹을 넘기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장·차남 측이 지분 일부를 KKR에 넘기면 과반 지분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KKR이 단일 최대주주에 오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업계에선 오스템임플란트의 경영권 매각 사례가 '벤치마크'로 거론된다. 최규옥 오스템임플란트 창업자는 회사가 2022년 9월부터 행동주의펀드인 KCGI의 공격을 받자 MBK파트너스가 UCK파트너스와 손잡고 경영권을 방어했다. 이후 MBK컨소시엄은 지난해 1월 공개매수를 진행해 경영권을 차지했다.
앞서 송 회장은 1조원 이상의 투자를 유치하겠다는 장·차남 측 계획에 대해 "장남과 차남은 OCI와의 통합을 저지한 후 일정 기간 경영권을 보장해 준다는 해외 자본에 지분을 매각하는 선택을 할 것이라 생각한다"고 밝힌 바 있다.
IB업계 관계자는 "결과로만 보면 경영권 프리미엄을 주지 않는 OCI 대신 신 회장과 가족 전체에 프리미엄을 주겠다는 PEF로 장·차남이 방향만 바꾼 것"이라며 "경영권 분쟁 이후 회사를 잘 이끌겠다는 명분엔 훼손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차준호/박종관 기자 chach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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