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피아니스트 다닐 트리포노프는 분명 우리 시대 피아니스트 가운데 가장 다재다능한 인물이다. 이틀에 걸친 내한공연 가운데 지난 1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첫 번째 공연을 찾았다. 알반 베르크의 ‘피아노 소나타’(1908)부터 존 코릴리아노의 ‘오스티나토에 의한 환상곡’(1985)에 이르기까지 20세기 음악으로만 채운 프로그램이었다. 청중과 연주자 모두에게 부담스러운 프로그램을 밀어붙였다는 건 트리포노프다운 일이었고, 이런 공연이 만석을 이뤘다는 사실 역시 트리포노프다웠다.
베르크의 ‘피아노 소나타’는 짙은 향수와 몽롱함이 특징인 연주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베르크보다는 스크랴빈과 라흐마니노프를 뒤섞은 듯한 해석이었다. 그런데 연주가 이어지면서 이런 해석이 100% 연주자가 의도한 게 아닐 수도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됐다. 두 번째 곡인 프로코피예프의 ‘풍자’와 세 번째 곡 버르토크 벨러의 ‘야외에서’는 후자의 4악장 ‘밤의 음악’처럼 나름대로 영묘한 느낌을 주는 대목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무겁고 답답해 역동성이 제대로 살지 못했다.
1부 순서의 전반주가 기교적 오점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베일을 두른 것처럼 무척 답답하게 들린 것은 세 가지 요인이 작용했다고 본다.
먼저 롯데콘서트홀의 잔향이 다른 공연장보다 심한 데다 파지올리 피아노의 음이 무거워 고음역이 제대로 부각되지 못했다. 세 번째는 트리포노프 자신의 문제였는데 페달링이 너무 심했다.
그러나 트리포노프가 페달링을 대폭 절제한 코플랜드의 ‘피아노 변주곡’부터는 명연의 연속이었다. 코플랜드의 곡은 제한적인 악상에도 불구하고 대조를 매우 엄밀하고도 극명하게 살렸으며 메시앙의 ‘아기 예수를 향한 20개의 시선’ 가운데 ‘아기 예수의 입맞춤’은 몽롱하지 않으면서도(메시앙이라면 무조건 이렇게 쳐야 하는 줄 아는 피아니스트가 적지 않다) 서정성과 경건함이 잘 어우러진, 감성 아니 영성이 충만한 연주였다. 원래 2부의 첫 곡으로 예정돼 있다가 1부의 마지막으로 바뀌었는데 전체적인 곡 구성으로 봤을 때 옳은 처사라고 생각한다.
2부 순서 역시 전체적으로 나무랄 데 없는 수준이었다. 리게티의 ‘무지카 리체르카타’(11곡 가운데 앞의 4곡만 연주)는 리듬과 셈여림, 템포의 조절이 정확하고도 자연스러웠다. 슈톡하우젠의 ‘피아노 소품Ⅸ’에서는 날카롭고 절박한 고음이 강렬하게 와닿았다. 존 애덤스의 ‘차이나 게이트’ 역시 고음이 특히 돋보였는데 이번에는 앞서와 반대로 무척 영롱한 터치였다. 두 곡은 트리포노프가 계속 페달링을 유지했다면 연주 자체가 성립하지 않았을 법한 작품이었다.
트리포노프는 청중의 열화 같은 성원에 답해 앙코르를 연주할 것처럼 피아노 앞에 앉았지만 아무런 연주도 하지 않았다. 왜일까 궁금해하다가 그가 그대로 일어서고 나서야 존 케이지의 ‘4분 33초’를 연주(?)한 것임을 깨달았다. 피아니스트가 4분 33초 동안 아무 연주도 하지 않을 것을 요구하며, 공연장에서 나는 모든 소리가 그대로 ‘연주’가 되는 곡이다. 리게티의 곡에서 빛을 발한 유머감각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황진규 음악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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