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국내에도 소개된 저서 <생각에 관한 생각>은 <넛지>의 저자 리처드 탈러, <블랙스완>의 나심 탈레브 등에게 영감을 준 역작으로 꼽힌다. 노벨경제학상을 안긴 ‘전망이론’은 손실회피 성향, 이익과 손실을 달리 받아들이는 비대칭성 등을 통해 전통 이론에서 설명할 수 없었던 의사결정 현상을 풀어냈다. 지금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이지만 논문이 발표된 1979년에는 획기적 개념이었다. 전망이론을 기초로 태동한 행동경제학은 이후 투자, 보험은 물론 의료 등의 공공정책 분야 의사결정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카너먼 교수의 통찰은 의대 정원 증원을 놓고 2개월 가까이 진행 중인 갈등을 해석하는 데도 유효하다. 그는 전망이론을 설명하면서 동일한 정보라도 표현 방식에 따라 의사결정이 달라지는 프레이밍 효과를 강조했다. ‘수술 시 생존율 90%’와 ‘사망률 10%’는 같은 결과지만 환자의 수용 태도는 확연히 달라진다는 것이다. 정부가 의대 증원 2000명을 꺼내 든 논거는 10년 후 의사 1만 명이 부족하다는 ‘프레이밍’에서 비롯됐다. 이를 ‘10년 뒤 의사가 지금보다 9% 부족하다’고 내세웠다면 초반 여론의 지지 강도는 크게 떨어졌을 것이다. 1만 명이 부족한 만큼 5년에 걸쳐 매해 2000명을 늘리겠다는 논리가 가능했던 배경이다.
휴리스틱의 중요 속성 중 하나는 확신을 강화하는 정보를 중심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성이다. 이른바 ‘확증편향’이다. ‘지난 27년간 묶인 증원 문제를 이번에 반드시 해결하겠다’ ‘번번이 증원을 좌절시킨 의사집단은 이익만을 추구하는 카르텔이다’ 등의 확신 속에 연간 2000명 증원의 파격안이 나올 수 있었다. 카너먼 교수는 여기에 기억 속 친숙함을 통해 성공 가능성을 가늠하는 ‘가용성’이 작동하면 자신감이 배가된다고 분석했다. 화물연대 불법 파업 등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경험은 의사 증원 문제에 대한 정부의 자신감을 키웠다. 지난 1일 윤석열 대통령은 의사 증원의 불가피성을 역설하면서 ‘건폭 척결’ 등을 개혁 사례로 꼽았다. 또 “어떤 정권도 증원을 해내지 못했고, 의사 직역 카르텔은 더욱 공고해졌다”는 발언을 통해 이런 인식을 드러냈다.
전망이론의 핵심 개념 중 하나는 손실회피 경향이다. 동전 앞면이 나오면 10만원, 뒷면은 15만원인 내기에 대부분 사람은 응하지 않는다. 같은 확률이더라도 15만원의 기대 이익보다 10만원을 잃었을 때의 손실을 더 크게 느끼기 때문이다. 월 300만~400만원의 월급을 받고 주 80시간의 장시간 노동을 전공의들이 버텨온 것은 미래의 안정적인 고소득을 바라는 기대심리가 있어서다. 미래 의료시장에 공급을 대거 늘리는 2000명 증원은 이런 기대수익의 직접적 손실 요인이다. 의료의 질 저하 등을 반대 이유로 꼽지만 본질은 손실회피를 위한 집단이탈인 셈이다.
행동경제학의 창시자인 카너먼 교수도 의료대란 사태에 쾌도난마식 해법을 내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주관적 확신은 자신이 만든 이야기의 정합성 때문이지 그 이야기를 뒷받침하는 정보의 질과 양 때문에 생기는 것은 아니다”며 과신의 오류를 지적한 옛 경제학자의 조언은 현시점에 새겨들을 만하다.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