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공단 운용역들이 줄줄이 로펌으로 이동하고 있다. 각 기업 주주총회에서 행동주의펀드의 압박 등에 따른 ‘표 대결’이 부쩍 늘어나고 국민연금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자 이곳 출신이 ‘귀한 몸’이 된 것이다. 로펌은 연기금들이 어떻게 의결권 방향을 정하는지를 파악하고 대응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일각에선 국민연금 등에 의결권 행사를 부탁하기 위한 ‘로비’ 창구 역할을 하는 게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4일 투자은행(IB)업계에 따르면 최근 정재영 전 국민연금 해외채권실장이 김앤장 법률사무소로 이직했다. 지난해엔 박성태 전 전략부문장이 이곳으로 옮겼다. 김앤장에는 최성제 전 수탁자책임실장도 몸담고 있어 국민연금의 전직 고위 운용역 3인이 한솥밥을 먹게 됐다.
이들은 모두 국민연금에서 수탁자책임 활동과 연관된 업무를 해왔다. 기금운용본부 이인자로 통해온 박 전 전략부문장은 퇴직 전까지 산하 수탁자책임실을 총괄하는 역할을 맡았다. 최 전 실장은 2018년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토대를 닦은 인물로 꼽힌다. 정 전 실장은 2017년 런던사무소장 발령 전까지 수탁자책임실에서 근무했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때 책임투자팀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법무법인 율촌과 법무법인 지평도 2022년 국민연금 출신 인사들을 영입한 바 있다.
그간 국민연금 운용역 사이에서 로펌은 다른 곳으로 가기 전 잠시 몸담는 용도로 쓰였다. 김재범 전 대체투자실장(법무법인 광장), 유상현 전 해외대체실장(김앤장 법률사무소) 등이 로펌을 거쳤다. 대체투자실장을 지낸 양영식 전 운용전략실장도 법무법인 율촌을 거쳐 스틱얼터너티브자산운용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최근 주총에서 국민연금의 캐스팅보트 역할이 중요해지자 요즘은 로펌이 적극적으로 영입 전쟁을 벌이고 있다. IB업계에선 국민연금의 의결권이 로비 대상에 오를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이번 한미사이언스 주총 사례가 대표적이다.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수책위)가 한미사이언스 주총을 앞두고 의결권 행사 방향을 정할 때 로펌들이 물밑에서 수책위 위원들에게 의결권 관련 의견서를 봐달라는 요구가 빗발쳤다는 전언이다.
한 관계자는 “이번 주총 시즌 때 수책위원 메일 주소를 구하러 다니는 로펌 관계자가 적지 않았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류병화 기자 hwahw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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