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아한 쇳소리가 울린다. 고여있는 물이 찰랑이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린다. 무대를 가득 채운 물로 눅눅해진 공기가 다가올 비극을 암시하듯 극장 공기를 무겁게 짓누른다.
국립창극단이 선보인 ‘리어’는 여러 면에서 파격적이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을 판소리로 노래하는가 하면 무대는 물을 가득 채운다. 영국에서는 이안 매캘란, 한국 무대에서는 이순재 등 원로 배우들이 맡아온 늙은 왕 ‘리어’는 32살 배우 김준수가 연기한다.
파격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영국의 희곡이 한국의 소리에 완벽하게 녹아들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중에서도 ‘리어’는 가장 참혹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늙은 아버지는 두 딸에게 버림받아 미치광이가 되고, 리어를 따르는 유일한 충신마저 아들에게 배신당해 두 눈을 모두 잃는다. 아비를 버린 두 딸은 같은 남자와 외도하며 서로를 질투해 장녀 고네릴이 차녀 리건을 암살한다. 내전이 벌어지고 리어를 지켜준 유일한 딸 코델리아까지 모두 죽는다.
파국으로 치닫는 비극에 ‘한’의 정서에 녹아든다. 인물들이 울부짖는 후회와 한탄이 구슬픈 우리 소리에 담겨 그 비통함이 극대화된다. 코러스는 때로는 우렁차게 리어왕과 함께 통곡하는가 하면, 때로는 그리스의 희곡처럼 불길한 미래를 암시하기도 한다. 배삼식 작가의 우리 옛말로 노래하는 시적인 대사까지 더해져 한스러운 정서가 아름답지만 구슬프게 담겼다.
배우들의 열연이 극에 한층 깊이를 더한다. 리어왕을 맡은 김준수는 미쳐가는 늙은 왕을 400년 전 리어왕의 귀신에 씐 듯한 연기를 선보인다. 딸에게 분노하는 왕의 모습부터 땅바닥을 뒹굴며 실실 웃는 미치광이까지 인간이 하염없이 무너지는 과정을 그려 보는 이들의 마음을 옥죈다. 글로스터 백작을 맡은 유태평양이 두 눈을 잃고 피를 흘리며 아들에게 용서를 비는 장면에서는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비통함이 객석으로 밀려온다. 절규하며 비통에 사무쳐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우적대는 손짓이 관객의 마음을 강렬하게 후벼판다.
▶▶▶[인터뷰] 창극 '리어' 주연 김준수 "2년전 보여주지 못한 새로운 연기 선보일 것"
그 배경에는 정영두 연출이 고안한 물웅덩이가 무겁고 서늘하게 무대를 채운다. 인물들이 첨벙첨벙 소리를 내며 걷고 뒹굴어 온몸을 적시고 지팡이를 던져 사방으로 물을 튀기기도 한다. 무대가 단순한 바닥을 넘어 인물들과 작용해 그들의 감정과 정서를 드러내는 도구가 된다. 그 물이 때로는 눈물 같기도 하고, 피 웅덩이를 연상하기도 한다.
전반적으로 차분한 무대지만 극적인 순간 강렬하게 분위기를 반전시킨다. 물을 다양한 형태로 활용한다. 1막의 마지막 장면에서 안개로 자욱한 무대에 조명과 천둥소리가 번뜩이며 관객들이 마치 직접 비를 맞으며 폭풍우 속에 서 있는 듯한 경험을 선사한다. 추운 겨울에는 날카로운 나뭇가지가 등장하고 눈이 휘몰아치면서 물웅덩이가 얼어있는 연못이 된다. 비, 안개, 눈, 폭풍에 이르는 물의 이미지가 인물들의 내면에 있는 고통과 감정을 생동감 있게 무대로 확장한다.
관객은 이 비극을 살짝 빗겨 관망하게 된다. 모든 인물이 자신만의 아집, 욕망, 그리고 어리석음에 눈이 멀어 스스로 무덤을 판다. 이들이 무너지는 과정에 관객들도 각자 품고 있는 과거와 후회를 찾을 수 있다.
공연이 끝날 즈음이면 수많은 감정에 절여지는 작품이다. 물웅덩이 속 희미하게 비친 자신을 바라보듯 자신을 되돌아보게도 된다. 안타까움에 두 손을 부여잡게 한다. 공연은 오는 7일까지 서울 중구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열린다.
구교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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