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태 칼럼] 한 경제 원로의 좌절된 꿈

입력 2024-04-07 17:43   수정 2024-04-08 00:22

“나는 박정희의 초대 경제수석을 지냈고, 당신은 그의 딸 박근혜의 초대 경제수석을 했으니 보통 인연이 아닙니다. 같이 뜻을 모읍시다.”

2년 전 어느 날 신동식 전 경제수석은 조원동 전 수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 전 수석은 1965년 33세의 젊은 나이에 박정희에게 발탁돼 한국 조선산업의 기틀을 닦은 주역이다. 구순을 넘긴 나이에도 한국해사기술 회장을 맡아 현역에서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탈(脫)탄소 미래 기술 국산화에 여생을 바치고 있다. 탄소포집 기술 개발 전문기업(카본코리아)을 세워 한참 후배인 조 전 수석을 불러들인 것. “그분 나이에 무얼 바라겠냐. 기후 대응에 무방비로 노출된 국내 산업과 기업을 위해 원천기술을 개발해 남기자는 소명의식이 전부”라는 게 조 전 수석의 얘기다.

하지만 이 회사가 맞닥뜨린 가혹한 현실은 한국이 탈탄소를 위해 국제사회에 섣불리 과도한 공약을 던져놓고 뒷수습은커녕 무전략으로 일관하면서 어떻게 방치하고 있는지, 그로 인해 기업들은 얼마나 많은 수업료를 부담하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신 전 수석이 탄소포집 기술 개발에 뛰어든 계기는 이렇다. 우리나라가 2018년 유엔에 수정 제출한 국가 온실가스 감축목표(2030년까지 40% 감축)는 주요국의 목표치를 훌쩍 웃돈다. 감축 수단도 마땅치 않은 마당에 가장 의욕적인 수치를 제시한 것이다.

이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은 두 가지. 첫째는 재생에너지 비율을 늘려 탄소 배출을 줄여가는 것인데, 태양광 수력 풍력 등 재생에너지는 국내 지리적 환경 여건을 감안하면 대체 주력에너지로 사용하기는 역부족이다. 남은 방법은 탄소를 포집해 없애는 것으로 탄소포집·저장·활용(CCUS) 기술이 핵심이다. 그나마 우리나라가 승부를 걸 만하다는 게 신 전 수석의 생각이다.

문제는 지금 기술력으로는 상용화가 어렵다는 점이다. 가령 탄소를 포집해 액화시킨 후 LNG선으로 운반해 지하 1000m에 매립하기까지 전 과정에 들어가는 비용은 t당 100달러 이상이다. 이를 통해 탄소를 줄인 대가로 탄소배출권을 획득해 시장에 팔아 비용을 충당하는 구조인데, 국내 탄소배출권 시장이 왜곡돼 t당 가격이 1만원을 밑돌고 있다. 원가를 뽑을 수 없는 구조로, 수지가 맞지 않으니 어떤 기업도 CCUS에 섣불리 투자할 형편이 못 된다.

반면 EU는 탄소배출권 가격이 t당 100달러 안팎이다. 그나마 수지가 맞는 상황이다. 미국은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따라 아예 CCUS 기술 개발에 t당 55달러의 보조금을 지급한다. 가격 경쟁력에서 우위를 점할 수밖에 없다.

한국 정부는 CCUS가 중요하고 키워야 할 기술인 줄 알면서도 무대응, 무전략이다. 보조금은커녕 연구개발(R&D) 자금 지원도 인색하다. 재생에너지에 대해 REC제도(기준가격과 시장가격 간의 차액 보전)를 운영하고 있지만 그걸로는 한계가 있다.

정부의 무개념 탈탄소 정책은 지난 문재인 정부 때 탄소배출 규제정책 주무 부처를 기획재정부에서 환경부로 이관한 탓도 크다. 탈탄소가 산업과 기업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면밀히 분석해 국가 전략으로 접근해야 하는데, 환경 문제로만 접근하는 부처에 키를 맡겼으니 전략은 고사하고 기업들의 부담만 키우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이 탈탄소를 오히려 기회로 삼으려고 도전한 기업들만 바보가 돼가고 있다. 탄소포집 기술을 선도적으로 개발해 새로운 산업을 일으키고, 기업들의 탈탄소 부담도 줄이고, 글로벌 기술 수출도 가능하게 하겠다는 소명의식을 갖고 카본코리아를 설립한 신 전 수석은 요즘 밤잠을 못 이루고 있다. 2년 반 동안 120억원을 쏟아부었지만, 정부의 무관심 속에 시장조차 형성이 안 돼 자본금은 바닥나고 인건비 감당도 힘들어 개발자 상당수를 내보낸 상태다. 그동안 수차례 정부 당국자를 만나 설득했으나 소용없었다. 급기야 투자자들로부터 사기꾼이라는 말까지 들으면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아 건강마저 잃을 뻔했다고 한다.

평생을 국가를 위해 살아온 92세 경제 원로의 꿈은 이렇게 허망하게 끝나가고 있다. 이것이 우리나라 탈탄소의 적나라한 현주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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