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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경제가 장기 불황인 '잃어버린 30년'을 딛고 정상 궤도로 올라갈 채비를 한다는 분석이 나왔다. 오랜 기간 지속된 디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하락)을 탈피하기 위해 금리를 올리고, 임금 수준도 급격히 인상하는 모습이다. 일각에서는 아직 구조적인 불황이 끝나지 않았다는 반박도 나온다.
8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일본은 마침내 '정상 경제'가 되어가는가'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일본 경제가 반등에 주력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1960년대부터 이어져 온 낮은 물가 수준과 저금리, 더딘 임금 상승세 등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도 지난달 28일 기자회견에서 “춘투에서의 강력한 임금 인상의 흐름, 사상 최고 수준의 설비 투자, 잇따르는 대형 해외 전략 투자 등에도 불구하고 디플레이션에서 탈출하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고 수십 년에 1번 있을 수 있는 중요한 변곡점에 서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임금 인상을 당연시하는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도록 힘쓰겠다"고 덧붙였다.
시장에선 이를 두고 일본 정부가 디플레이션 선언을 준비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2022년부터 지속된 물가 상승세로 인해 임금 상승 동기가 커졌고, 이에 따라 기업이 가격을 인상할 수 있는 명분이 나타났다. 임금 인상이 물가 상승을 촉진하고 다시 임금 인상으로 이어지는 '임금의 나선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는 관측이다.
일본은 2022년 1분기부터 물가가 점차 상승하기 시작했다. 코로나19로 인한 공급망 혼란과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원자재 가격이 상승한 결과다. 지난 2월 근원 소비자물가지수는 1년 전에 비해 2.8% 치솟았다.
물가가 상승하자 임금도 덩달아 뛰었다. 일본의 봄철 임금협상인 '춘투'에서 노사는 올해 임금 상승률을 평균 5.3%로 합의했다. 1991년 이후 최대 인상 폭이다. 일본 중앙은행도 17년 만에 금리 인상을 결정하면서 2016년 이후로 고수한 마이너스 금리 정책을 폐기했다.
일본이 디플레이션을 탈출할 가능성이 커지자 증시가 활황세를 보였다. 일본의 대표 주가지수인 닛케이225는 올해 수익률 15%를 넘기며 고공 행진했다. 지난 2월에는 34년 만의 최고점을 경신하기도 했다. 츠토무 와타나베 도쿄대 교수는 "임금과 물가의 선순환이 나타나면서 일본 중앙은행도 금리 인상을 결정한 것 같다"며 "아직 미숙하지만 일본 경제는 정상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아직 구조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반박도 나온다. 실질 임금 상승률이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에 대한 데이터가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이 때문에 임금 상승효과로 인한 소비와 저축 증가분이 정확히 측정되지 않고 있다. 닛코 자산운용의 수석 전략가인 나오미 핑크는 "일본 가계의 소비 여력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경제 선순환'이 구축됐는지 알 수 없다"고 설명했다.
또 임금 인상에 반대하는 국민 정서도 걸림돌로 여겨진다. 일찌감치 고령화에 진입한 일본은 연금을 수령하는 노령층을 중심으로 임금 인상을 반대하는 심리가 자리 잡았다. 최근 엔저 현상으로 인해 수입 물가가 상승하며 생활비 부담도 커진 상태다. 일본 내각부가 올 초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일본 가계의 62%가량은 재정 상태가 불안하다고 답했다.
와타나베 교수는 "연금을 받는 대다수의 노령층은 임금과 물가가 상승하지 않길 바란다"며 "디플레이션 탈출에 저항하는 심리가 거세질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낙수효과도 관건이다. 일본 대기업에서 임금을 올리는 만큼 중소기업도 임금을 올릴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일본 중소기업의 고용 비중은 약 70%대다. 현금 유동성이 부족한 중소기업에서 임금 인상을 보류하면 소비 진작 효과는 감소할 수밖에 없다. 소비가 정체하면 임금에서 물가로 이어지는 순환 체계도 붕괴한다.
SBI증권의 마츠오카 미키히로 수석 애널리스트는 "임금 상승분이 물가로 옮겨가는 메커니즘이 아직 구축되지 않았다"며 "서비스 물가 상승세가 오랜 기간 정체된 만큼 이 효과를 파악하는 데 긴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고 역설했다.
오현우 기자 oh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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