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스는 영원하다.” 잉글랜드프리미어리그(EPL) 리버풀을 이끈 명장 빌 섕클리 감독이 남긴 명언이다. 오랜 기간 최정상급 실력을 보여준 선수라면 일시적인 부진이나 위기를 겪더라도 중요한 순간에는 전성기 자질을 유감없이 보여줄 수 있다는 얘기다.
지난 9일 서울 잠실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막심 벤게로프(50)의 내한 리사이틀은 ‘거장의 클래스’를 증명한 자리였다.
2016년 이후 8년 만에 한국 청중 앞에 선 벤게로프는 어떤 순간에도 여유로움을 잃지 않았다. 1부 주요 작품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느낀 혼란과 고통의 인상을 담은 프로코피예프 바이올린 소나타 1번이었다. 벤게로프는 비브라토, 보잉의 폭과 속도를 하나하나 치밀하게 계산해 연주하기보단 자신이 이해한 작품의 어법을 직관적으로 표현하며 프로코피예프 고유의 역동적인 악상을 생생하게 펼쳐냈다.
그의 오랜 악기인 1727년산 스트라디바리우스 엑스 크로이처와는 마치 한몸같이 움직였다. 저음에선 거대한 대지를 뒤흔드는 듯한 광활한 울림으로 귀를 사로잡았고, 고음에선 우아하면서도 곧게 뻗어나가는 선명한 음색으로 강한 호소력을 만들어냈다. 2, 4악장에선 무언가를 파괴하려는 것처럼 강하게 악기를 내려치는 소리가 강조됐는데, 피아노와 바이올린이 서로의 음향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격렬하게 대립하며 팽팽한 긴장감을 선사했다.
그의 프랑크는 사색적이면서도 위엄이 넘쳤다. 기교적인 악구들을 정교하게 처리하면서도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거대한 호흡은 한시도 잃어버리지 않았다. 윤슬처럼 찬란한 음색으로 점철된 서정적 선율과 과감하면서도 극적인 악상 표현의 대조로 만들어낸 완성도 높은 연주는 청중을 압도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마지막 작품은 라벨의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치간느’. 집시음악 스타일을 모방한 이 작품은 바이올리니스트에게 ‘초절기교’를 요구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은 난곡이다. 작품은 바이올린 카덴차(무반주 독주 구간)로 시작되는데, 벤게로프는 한음 한음을 강하게 밀어내는 동시에 미묘한 화성 변화를 귀신같이 짚어내며 숨 막힐 듯한 긴장감을 유발했다. 중음 트레몰로, 더블스토핑 등 바이올린으로 낼 수 있는 모든 기교가 총집합된 곡인 만큼 중간중간 소리가 뭉개지는 구간이 더러 있긴 했지만, 작품의 주선율은 한순간도 흔들리는 법이 없었다.
명징한 리듬 표현과 장대한 활 움직임으로 응축된 음악적 표현을 서서히 증폭시키며 만들어내는 폭발적인 에너지는 라벨이 그려낸 ‘집시의 형상’ 그 자체였다. 객석에서 우레와 같은 환호성과 박수가 터져 나온 순간이었다.
한층 더 깊어진 그의 음색과 녹슬지 않은 기교에서 세월의 선물을 엿볼 수 있었다. ‘거장의 품격을 보여준 연주.’ 이보다 더 정확히 그의 연주를 표현할 문구가 있을까.
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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