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을 경험한 세대에겐 지정학적 갈등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이 정상이고, 평화가 비정상적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새로운 냉전 시대로 진입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더글라스 레디커 전 세계경제포럼(WEF) 글로벌 아젠다협의회 의장은 11일 ‘2024 경제·금융 컨퍼런스’에서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진행되면서 새로운 냉전에 접어들고 있다”며 이처럼 말했다. ‘폴리코노미의 습격: 생존게임의 시작’을 주제로 서울 한남동 그랜드하얏트호텔에서 열린 이날 컨퍼런스에선 일상화된 지정학적 갈등과 미국의 대선 등에 세계 각국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두고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레디커 전 의장은 시간이 갈수록 보호무역주의가 심화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수년 전까지만 해도 워싱턴 정가에선 자유무역에 대한 옹호론이 주류였지만, 오늘날엔 경제 정책이 주로 국가 안보 문제에 압도되고 있다”며 “세계 각국의 정책 입안자들은 더 이상 경제와 안보를 분리할 수 없으며, 두 가지의 분리가 아니라 균형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고 했다.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석좌교수는 레디커 전 의장과의 좌담회에서 “경제학 연구란 X축과 Y축을 그려놓고 그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는 과정인데, 최근 미·중 패권 경쟁으로 인해 X축과 Y축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며 “강대국의 패권 경쟁, 대만에 대한 중국의 통일 의지, 한국에 대한 북한의 위협 등이 모두 복합적으로 연결돼 있다는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했다.
미국 대선 결과에 따른 영향도 이날 주요 의제로 논의됐다. 레디커 전 의장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당선되면 미국은 유럽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녹색 정책을 폐기하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의 분담금을 더 요구할 것”이라며 “미국과 유럽이 분절화되는 상황에서 기술력을 갖춘 한국이 유럽 시장에서 더 많은 기회를 얻을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는 상황에 대해선 “보호무역주의가 훨씬 강화될 것”이라고 했다.
이날 컨퍼런스에선 글로벌 기술 경쟁에 대한 논의도 이뤄졌다. 티모시 파판드레우 이머징 트랜스포트 어드바이저 최고경영자(CEO)는 “세계는 총알 대신 알고리즘으로 싸우는 새로운 전장을 맞이하고 있다”며 “승자가 얻을 수 있는 포상은 영토가 아니라 기술 지배권”이라고 말했다. 그는 “인공지능(AI) 기준을 선도하는 것이 혁명적 기술의 규칙을 설정하는 열쇠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고금리 현상이 장기간 이어질 것이란 전망도 나왔다. 정영식 대외경제정책연구원 국제거시금융실장은 “미국의 경제활동참가율이 코로나19 사태 이전보다 여전히 낮은 수준이고, 세계 주요국의 인구 고령화로 노동 공급이 국제적으로 줄고 있다”며 “노동 공급 감소로 인한 인플레이션 압력이 높아진 만큼 과거와 같은 저금리 상황이 다시 오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어 “만약 미국 중앙은행(Fed)이 기준금리를 낮춘다면 인플레이션 요인보다는 임박한 대선을 앞두고 정치적 이유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고 덧붙였다.
정의진 기자 justj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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