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사 초청 특강 : 이 시대 최고의 초상화가’.
동네에 붙은 현수막을 본 딸의 심장은 쿵 내려앉았습니다. 그림을 그리고 싶다며 날 버리고 떠나간 엄마, 그리고 지금은 성공한 화가이자 유명 인사가 된 엄마를 30년 만에 볼 기회였거든요.
나를 본 엄마는 뭐라고 말할까. 미안하다며, 그간 고생이 많았다며 안아줄까.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오랜 세월 엄마 없는 아이로 살며 쌓인 설움을 터뜨릴까. 아니면, 세월이 흐르고 여러 일을 겪은 지금, 나도 그때 엄마의 마음을 아주 조금은 이해할 수 있게 됐다고 말해줄까. 강연장 맨 앞줄에 앉아 엄마의 강연을 들으면서도 딸은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강연이 끝나고 열린 칵테일파티에서 마침내 엄마는 딸에게 걸어왔습니다. 딸을 본 엄마는 활짝 웃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오늘 와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강연은 잘 들으셨나요?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30년 만에 딸을 만난 엄마는, 이렇게 말한 뒤 또 다른 사람에게로 향했습니다.
‘엄마가… 날 못 알아봤어.’ 딸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습니다. 칵테일파티가 끝날 때까지, 그렇게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4년이 흐른 뒤 엄마는 연락 한 통을 받았습니다. 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인간의 영혼을 들여다본 위대한 휴머니스트 초상화가. 딸을 알아보지 못한 비정한 어머니. 앨리스 닐(1900~1984)의 진짜 얼굴은 둘 중 무엇이었을까요. 닐의 삶이 어땠는지,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 이 모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i>*이번 기사에 첨부된 그림 중에서는 남녀의 신체가 그대로 노출된 작품이 후반부에 몇 점 있습니다. 성적(性的)인 뉘앙스가 전혀 없는 앨리스 닐 특유의 화풍이지만, 읽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i>
닐의 어머니는 아주 똑똑하고 외향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요즘 같으면 뭘 하든 자신의 일에서 승승장구할 만한, 그야말로 여걸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미국 사회는 철저한 남존여비 사회. 여성이 할 일은 결혼해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는 것뿐이었습니다. 취업해 ‘제대로 된 일’을 한다는 건 꿈도 꿀 수 없는 일. 1920년 전까지 여성은 투표조차 할 수 없었으니까요. 능력이 탁월한데다 성격도 불같은데 아무것도 할 수가 없으니, 어머니는 늘 우울과 짜증에 시달렸습니다. 자살 소동도 자주 벌였습니다. “난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는 게 그녀의 말버릇이었습니다.
그러니 화가가 되고 싶다는 닐에게 어머니가 이렇게 말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림 같은 소리 하지 마. 도대체 네가 뭘 하겠다는 거니? 넌 그냥 여자애일 뿐이야.” 하지만 닐은 숨어서 계속 그림을 그렸습니다. 훗날 닐은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내가 나로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은 그림을 그릴 때였지요.” 그렇게 닐의 어린 시절은 흘러갔습니다.
“비서가 되거라.” 고등학생이던 닐에게 부모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학에 보내줄 돈도 없고, 비서가 되면 돈을 벌 수 있는 데다, 결혼 상대를 찾기에도 괜찮은 직업이라는 설명이 따라왔습니다. ‘착한 아이’였던 닐은 부모님 말씀대로 타이핑과 속기 수업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바보 같은 짓이니. 너처럼 똑똑한 아이는 다른 공부를 해야지.” 고등학교 교장 선생님이 이렇게 말했지만 닐은 웃으며 말했습니다. “괜찮아요. 결국 이렇게 될 거였는데요 뭐.” 그렇게 닐은 학교를 졸업한 뒤 곧바로 군부대에 취업해 비서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깨달음의 순간은 갑작스레 찾아왔습니다. 일을 마치고 집에 가던 스물한 살의 어느날이었습니다. ‘이건 내가 원했던 삶이 아니야. 평생 이렇게 살 순 없어. 나는 미술 공부를 할 거야. 그리고 화가가 되겠어.’ 그렇게 닐은 야간 미술 수업을 듣기 시작했고, 곧이어 일을 그만둔 뒤 필라델피아 여성 디자인 학교에 등록해 본격적인 미술 공부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닐은 시험마다 최고의 성적을 거두고 갖가지 교내 상을 휩쓸면서 금세 두각을 드러냈습니다.
닐이 운명의 사랑을 만난 건 이때입니다. 24살의 여름, 닐은 쿠바에서 온 한 청년을 우연히 만났습니다. 낭만적이고 반항적이며 예술적 재능이 넘치는, 화가를 지망하는 잘생기고 키 큰 청년이었습니다. 둘은 금세 뜨거운 사랑에 빠졌습니다. 이듬해인 1925년 둘은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환상 같은 행복으로 시작된 둘의 결혼 생활이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두 사람은 가정을 이루고 살기에는 자기 자신을 너무 많이 사랑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부부는 가난했습니다. “나는 그림을 그릴 테니 돈을 벌어와 줘. 내가 더 잘 그리니까 당신이 희생해야지.” “무슨 소리야. 그 반대지. 내가 그림을 그려야 해.” 둘은 서로에게 이렇게 말하며 끊임없이 싸웠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어설프게 일하고, 어설프게 그림을 그렸습니다. 첫째 딸이 태어난 뒤에도 이런 상황은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다 딸은 첫돌도 되기 전 병에 걸려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닐은 울며 후회했습니다. ‘우리가 작고 더러운 방에 살지 않았다면, 5달러짜리 기름 난로만 있었다면 아기가 그렇게 심하게 아프지 않았을 텐데. 의사를 부를 돈이 있었다면 아이를 살렸을 텐데….’
닐과 남편은 자신들의 잘못 때문에 아이를 잃었다는 죄책감과 상실감에 사로잡혔습니다. 곧바로 둘째 아이를 갖기로 한 건 그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슬픔과 고통도, 새로 태어난 둘째 딸 이사베타도 이 부부의 본질을 바꿔 놓지는 못했습니다. 계속된 싸움 끝에 결국 남편은 닐과 상의도 없이 이사베타를 쿠바에 있는 자기 가족에게 맡긴 후 프랑스로 도망가버렸습니다.
한순간에 가족과 생이별하며 큰 충격을 받은 닐은 정신질환으로 1년간 병원에 입원하게 됩니다. 이 시기, 아기 침대 창살에 목이 끼어 질식사한 아기에 대한 신문 기사를 읽고 그린 닐의 그림이 ‘헛된 노력’입니다.
침대에서 세상을 떠난 아기의 그림이 닐의 참담한 심정을 드러냅니다. 예술가로서의 삶과 아이를 키운다는 것. 그 두 가지를 모두 이루려 노력했던 지난 세월은 헛된 노력에 불과했다는 후회가, 그림 속에 녹아 있습니다.
하지만 닐은 결국 충격을 이겨냈습니다.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마치고 퇴원한 그는 뉴욕 그리니치빌리지로 향했습니다. 예술가들과 유색인종, 사회 부적응자 등이 뒤섞여 사는 조금 위험한 동네. 하지만 활기 넘치는 이곳에서 그는 동네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닐처럼 ‘가진 게 없는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리려 했던 화가는 거의 없었습니다. 초상화라는 그림 자체가 원래 귀족과 상류층의 모습을 남기기 위해 시작된 장르였고,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에 별 관심이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닐은 달랐습니다. 상처받고, 소외되고, 무시당하는 사람들에게 마음이 갔습니다. 그 자신도 그랬으니까요.
닐은 이웃들을 캔버스 앞에 세우고, 대화를 나누며 성격과 내면 깊숙한 곳에 있는 기억들까지 모두 파악해 이를 그림에 담아냈습니다. 닐은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추상화도 좋지만 예술은 결국 사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담아내고 싶었습니다.” 그만큼 닐은 사람을 그리는 데 진심이었습니다. “나는 그림을 그릴 때 완전히 그 모델의 마음이 돼. 가끔은 다시 나 자신으로 돌아오는 게 너무 어려울 정도로. 그래서 모델이 집으로 돌아가고 나면 너무나 허전하고 두려워져. 마치 폐허에 버려진 느낌이야.”
하지만 이런 그림들은 거의 팔리지 않았습니다. 당시 미술시장의 대세였던 추상표현주의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입니다. 닐이 1944년 고물상에서 ‘kg당 4센트’(지금 가치로 800원가량) 값에 다른 화가 작품들과 함께 묶음으로 팔리던 자신의 작품을 발견해 다시 사온 적도 있었습니다. 오늘날이라면 한 점에 수억~수십억 원은 할 작품들이지만 그 때는 그런 취급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닐은 이런 수모를 겪으면서도 꿋꿋이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렸습니다.
닐 역시 ‘자식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하는 엄마’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여전히 닐에게는 아이들보다 예술이 먼저였습니다. 새 애인이 아이를 학대한 적도 있었고, 아이가 영양실조로 병에 걸려 실명할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닐이 아이들을 사랑하지 않은 건 결코 아니었습니다. 없는 살림에도 닐은 아이들에게 최대한 많은 걸 해주려 노력했고, 아이들을 친구처럼 대했습니다.
이런 사랑이 전해진 덕분에 아이들은 구김살 없이 훌륭하게 자랐습니다. 두 아들 모두 장학금을 받고 컬럼비아 대학교를 졸업한 뒤 훌륭한 의사와 변호사가 됐으니까요. 닐의 작은아들은 이렇게 회고합니다. “닐은 좋은 엄마이자 아주 좋은 친구였어요. 어려운 일도 있긴 했지만, 그건 누구나 감당해야 하는 삶의 한 부분입니다. 참고 사는 부분도 있는 게 인생이니까요. 그걸 감안하면 닐이 내 엄마라는 건 분명히 큰 선물이었습니다.” 큰아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위대한 주부 대신 위대한 화가가 됐고, 저는 그런 어머니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정신없이 그림을 그리면서도 아이들을 키워내는 사이, 60대가 된 닐에게 마침내 전성기가 찾아왔습니다. 추상화가 저물고 구상화의 유행이 시작됐고, 전쟁이 끝나고 시대가 변하면서 다양한 인간들의 내면에 관한 관심이 생겨나고, 사회적 약자를 주목하는 시선이 힘을 얻는 등 그야말로 마법같은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그의 작품을 외면하던 미술계도 앞다퉈 닐을 칭송하기 시작했습니다. 미술 잡지 아트뉴스는 이렇게 보도했습니다. “현대 미술에서 초상화가 죽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닐의 그림을 보고 나서 입을 꿰매야 할 겁니다.”
1927년부터 1964년까지 개인전을 불과 6차례만 열었던 닐은 1964년부터 1984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마지막 20년 동안 60번이 넘는 개인전을 열었습니다. 주요 미술관들은 닐의 작품 전시를 열기 위해 경쟁을 벌였고, 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은 닐에게 제1회 전국 여성 예술인 평생 공로상을 줬습니다. 닐은 1970~1980년대 내내 전국의 대학과 박물관 등을 돌아다니며 자기 삶과 작품에 대해 설명하는 강연을 열었습니다.
시계를 돌려, 남편이 이사베타를 쿠바로 데리고 간 뒤 모녀는 거의 만나지 못했습니다. 남편의 식구들은 이사베타에게 “너희 엄마가 그림 때문에 너를 버렸다”고 했고, 닐의 편지를 중간에서 가로챘습니다. 딸이 어릴적 닐에게 보낸 이 편지는 지금 봐도 가슴이 아픕니다. “사랑하는 엄마, 왜 엄마는 답장을 보내주지 않나요? 엄마에게 카드를 쓰고 또 쓰지만 한번도 답장을 못 받았어요. 사랑을 담아, 이사베타가.”
이사베타는 자라나며 닐을 증오하게 됐습니다. 딸 입장에서는 그럴 만도 했습니다. 엄마는 나를 데리러 오기는커녕 편지에 답장도 하지 않았습니다. 열일곱 살때 쿠바의 부잣집 도련님과 약혼했지만, 이사베타의 부모님이 이혼했다는 이유로 파혼당한 일도 있었습니다. 이사베타는 스무살 때인 1948년 미국에서 닐을 만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엄마의 옷차림, 엄마의 모습, 엄마가 살아온 삶의 방식까지 모든 것이 부끄러워요. 당신이 왜 날 떠났는지 나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해요.” 그리고 30년이 흘렀습니다.
긴 세월 동안 이사베타는 이혼을 비롯해 여러 일을 겪었고, 닐을 이해해보려는 생각을 조금이나마 하게 됐습니다. 다시 만나 대화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1978년 이사베타가 사는 동네에 닐이 강연을 왔을 때 참석해 맨 앞줄에 앉았던 건 이런 이유에서였습니다. 하지만 시력이 좋지 않은 데다 백내장을 앓고 있었던 닐은 이사베타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원래 앓고 있던 우울증은 그 이후 더 악화됐고, 4년 뒤인 1982년 이사베타는 스스로 세상을 등졌습니다. 가족들은 “강연회 이후 이사베타의 증오와 실망이 한없이 깊어졌다”고 말했습니다.
딸의 사망 소식을 들은 닐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제 이사베타 꿈을 꿨는데.” 그리고 2년 뒤인 1984년, 닐은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닐에게 자기애성 성격장애가 있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하버드대학교 강연에서 슬라이드가 넘어가는 도중 닐은 외쳤습니다. “저기 누가 나가고 있네요. 가지 마세요. 가지 마세요. 봐요, 앤디 워홀 얘기를 이제 시작할 거에요.” 그처럼 늘 인생에서 닐은 무대를 떠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무대에 올라 계속 남아있기 위해 닐은 많은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
닐의 작품 역시 우아하지 않습니다. 표현과 기법은 거칠고, 나체로 뚫어져라 관람객을 바라보는 인물들은 부담스럽게 다가올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닐의 그림이 보는 이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것도 사실입니다. 평론가인 존 조나스 그루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닐의 작품은 기괴하면서도 숭고합니다. 사람들은 비극과 여러 가슴 아픈 단점을 갖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아름다운 이야기와 내면의 위대함도 갖고 있지요. 누구나 그렇습니다. 닐은 사람들이 그 자신조차도 인식하지 못했던 것들을 보고 이를 캔버스에 표현했습니다. 거기서 나온 건 일종의, 삶을 위한 절박한 몸짓에서 나온 아름다움이었습니다.”
닐의 이런 특징은 그의 자화상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가난한 동네 이웃부터 앤디 워홀 같은 슈퍼스타까지 수십년간 수많은 사람의 초상화를 그려오면서 닐은 자화상을 한 번도 그리지 않았습니다. 1980년 닐이 자화상을 발표했을 때 세상이 깜짝 놀랐던 건 그 때문이었습니다. 닐의 마지막 작품 중 하나인 이 누드 그림에서, 작가는 붓을 들고 관람객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노화로 늘어진 살(작가 자신은 ‘뼈에서 떨어져 나가고 있다’고 표현)에 대한 적나라한 표현과 강렬한 느낌 덕분에 똑바로 바라보기 어려운 느낌마저 들지만, 더 중요한 건 들고 있는 붓과 그림을 그리려는 의지로 가득한 강렬한 눈빛입니다.
이 작품을 발표하면서 닐은 말했습니다. “나는 평생 내가 그림 그릴 자격이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왔습니다.” 그리고 닐은 삶의 막바지에서, 이 자화상을 통해 마침내 한 인간으로서 자신의 잘못과 과오를 바라보고 솔직히 인정한 뒤 화가로서의 삶을 긍정할 수 있었습니다.
닐은 그림을 통해 세상과 인생을 날것 그대로 표현해 왔습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인생이란 것이 언제나 행복하고 깔끔하고 완벽한 게 아니라는 사실,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참아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는 사실을 항상 불편하게 상기시킵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닐의 작품은 평면의 그림 한 장 한 장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진솔한 본질을 품을 수 있었습니다.
삶의 끝으로 달려가던 어느날 닐은 말했습니다. “내가 추구했던 것, 내가 걸어왔던 길은 ‘무슨 일이 있어도 계속’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습니다.” 삶이란 불완전하고 때로는 부끄러울 정도로 추한 것. 하지만 이런 부족함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간다면 결국 자신을 긍정할 수 있을 거라고. 나도 잘난 것 하나 없는 인간이지만 이 사실 하나만큼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고. 네가 누구든 무슨 일이 있었든, 용기를 내서 똑바로 앞을 보고 걸어가라고.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린 자화상은 이렇게 우리에게 말하는 듯 합니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
<i>**Alice Neel: The Art of Not Sitting Pretty(Phoebe Hoban 지음)을 중심으로 나의 사랑스러운 방해자(줄리 필립스 지음, 박재연 옮김, 돌고래 펴냄), 뉴요커지 기사 ‘Alice Neel’s Portraits of Difference’(New Yorker), 뉴욕타임스 기사 ‘It’s Time to Put Alice Neel in Her Rightful Place in the Pantheon’(Roberta Smith) 등을 참조했습니다.</i>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5만여명 독자가 선택한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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