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이미지를 담은 63편의 시가 실린 이번 시집에서 그는 ‘운율과 말맛’이란 시의 본연을 복원하는 동시에 현대적 감각으로 그 외연을 확장한다.
시집 제목이기도 한 수록 시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는 만해 한용운을 기리는 유심작품상(2023년)을 받은 작품이다. “늘 뒤따라오던 길이 나를 앞질러 가기 시작한다/ 지나온 길은 직선 아니면 곡선/ 주저앉아 목 놓고 눈 감아도/ 이 길 아니면 저 길, 그랬던 길이/ 어느 날부터 여러 갈래 여러 각도로/ 내 앞을 질러간다”로 시작하는 시다.
이렇게 길과 관련한 이미지가 시집 전체를 감싼다. 슬프고도 애틋한 삶의 풍경이 스며 있는 시들이다. 고 시인은 “개인과 사회, 과거와 현재, 지질과 역사의 단면을 길의 이미지로 치환했다”며 “그 길에서 만난 사람과 사물, 사회의 이면, 세계의 표정 등을 시로 썼다”고 말했다.
‘망고 씨의 하루’는 동시대 소시민의 일상을 거울처럼 마주하게 되는 시다. “저 달고 둥근 과즙 속에/ 납작칼을 품고 있었다니// 아프리카로부터/ 여기까지 오는 동안// 노예선을 탔구나./ 너도”라고 시인은 썼다. 지치고 소진된 나의 삶과 망고가 겹쳐지고 ‘망고의 씨’는 ‘망고 씨(氏)’로 환기된다.
비교적 짧은 시가 많은 점도 이번 시집의 특징이다. 덕분에 시의 운율이 더 도드라진다. “멀다// 아직도 골목을 맴돌며/ 소를 찾아 헤매는// 저 빈집의/ 오랜// 침묵!”이 전부인 짧은 시 ‘심우장 가는 길’이 그런 예다. 시인은 “시를 쓰거나 퇴고하는 과정에서 몇 번씩 소리 내어 읽고 또 읽는다”며 “손으로 다듬은 문장 퇴고와 함께 혀로 궁글리는 입말 퇴고에 시간을 많이 들인다”고 설명했다.
고 시인은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유배시첩-남해 가는 길’이 당선돼 등단했다. 이후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을 출간하며 맑은 언어, 따뜻한 시선으로 우리 마음속 순수한 원형을 노래하는 시인으로 알려졌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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