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당 1사만 남긴다' 日기업 살린 구조조정 원칙[공멸 위기의 석유화학②]

입력 2024-04-18 08:12   수정 2024-04-22 09:20

이 기사는 04월 18일 08:12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한국 화학업계가 처한 불황은 30년 전 일본의 상황과 닮아있다. 난립해있던 기업들이 생존을 위해 단가 경쟁을 벌였고 투자가 중복되면서 산업 전반으로 수익성이 곤두박질쳤던 시절이다. 당시 일본 기업들의 생존을 위협했던 건 무서운 속도로 규모를 키우던 한국과 대만 기업들이었다. 중국의 부상으로 존폐 위기에 선 오늘날 국내 화학사들의 상황과 동일하다.

일본은 1990년대를 기점으로 과감한 구조조정을 단행해 위기를 돌파했다. '1지역당 1사만 남긴다'는 원칙을 세우고 기업 간 통폐합을 추진해 과당경쟁을 멈췄고, 수익성이 높은 고부가 제품으로 전환을 이끌었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 판을 깔아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불황에 강한 일본 업체들
국내 석유화학 시장은 원유와 천연가스 등 원료를 해외에서 수입해온다는 점에서 일본 시장과 유사한 면이 있다. 차이는 범용 제품과 고부가제품 비중에 있다. 한국의 수출 의존도가 더 높은 편인데 수출 상품 대부분이 저렴한 가격으로 승부를 보는 범용 제품이라 업황 사이클에 따른 실적 변화가 크다.

일본 화학사들은 한국 업체와 비교해 불황 사이클에도 수익성을 유지했다. 삼성증권에 따르면 석화산업이 호황이었던 2016~2019년엔 한국(LG화학·롯데케미칼·한화솔루션·금호석유화학)과 일본(신에쓰화학·미쓰비시화학·아사히카세이·미츠이화학)의 이익 격차가 약 4조원에 불과했지만 불황이 시작된 2021년 하순부턴 격차가 약 10조원까지 벌어졌다. 2009년 미츠이화학을 제외하곤 영업적자를 기록한 곳은 없었다. 시황 변동에 무관하게 꾸준히 이익을 냈다.

범용 석화 매출에 얼만큼 의존하느냐가 희비를 갈랐다. 일본 화학업체들의 작년 범용 석화 매출 의존도는 20~40%에 불과한 반면 한국은 적게는 30~40%에서 많게는 80~90%대에 육박했다. 청정에너지 등 고부가 사업을 대폭 확대한 LG화학과 한화솔루션을 제외한 나머지 업체들은 석화에 대한 의존도가 컸다. 롯데케미칼(96%), 금호석유화학(88%) 순으로 높았고 제일 의존도가 낮은 곳은 아사히카세히(24%)였다.
"1지역당 1곳만 남긴다"
일본 석화업체들이 탄탄한 체력을 갖춘 건 한국보다 20년 앞선 정부 주도 산업 구조조정 덕이다. 일본은 1950년대부터, 한국은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석화산업이 태동했다. 불황도 20년 먼저 경험했다. '잃어버린 30년'이라 불리는 장기 불황은 석화산업도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 일본이 택한 생존방식은 범용 부문의 통폐합이었다. 물량 경쟁으로 승부를 보겠다는 판단 대신 외형 성장을 포기하고 설비를 축소하는 결정을 했다.

하이투자증권에 따르면 2000년대 들어 일본 내 구조조정이 진행된 나프타분해시설(NCC) 규모만 117만톤에 달했다. 전체 생산량의 15%를 단번에 줄였다. 대표적인 곳이 미쓰비시화학이다. 중부지방의 미에현 욧카이치에 소재한 연산 27만톤의 에틸렌 설비를 2001년 폐쇄했다.

폴리에틸렌(PE)·폴리프로필렌(PP)·폴리염화비닐(PVC) 등 개별 폴리머 제품 설비를 통합하고 영업권 양도를 통한 합작법인(JV)을 설립하는 식으로 업체 수를 줄여갔다. 과다경쟁 구조에서 소수 기업들을 중심으로 한 과점적 경쟁구조로 전환하는 과정이었다.

가장 많이 축소된 건 PP업체였다. 1994년만 해도 14곳에 달했던 업체는 4곳으로 줄었다. 1995년 미쓰이석유화학(50%)-우베홍산(50%)이 설립한 그랜드폴리머, 2003년 일본폴리켐(65%)-칫소(35%)의 일본폴리프로 설립이 대표적이다. 같은 기간 PVC는 16곳에서 7곳, PE는 14곳에서 8곳이 됐다. 각각 1995년 닛폰제온(40%)-스미토모화학(30%)-도쿠야마(30%)의 신제일염비, 1997년 마루젠폴리머(50%)와 칫소(50%)의 게이요폴리에틸렌 설립 사례가 있다.

구조조정 원칙은 '1지역당 1사만 남긴다'였다. 미에현의 욧카이치엔 미쓰비시화학과 도소 두 곳이 에틸렌 공장을 두고 있었는데 2021년에 생산능력이 앞선 도소만 남고 미쓰비시는 가동을 중단했다. 치바현에선 게이요에틸렌이 남았다. 동일단지에 있던 마루젠석유화학과 스미토모화학, 미쓰이화학이 게이요로 통합 운영됐다. 그 뒤로 2015년 들어선 미쓰이와 스미토모가 철수했다.
판 깔아준 일본 정부...한국은 각자도생
일본이 과감한 구조조정에 나설 수 있었던 데엔 정부의 역할이 컸다. 당시 통산성(MITI·현 경제산업성)은 5개년 한시법인 '특정산업구조개선 임시조치법(약칭 산구법)'을 1983년 5월부터 시행했다. △효율적인 설비로의 생산 집중 △공동투자 △공동판매회사 설립 △과잉설비 처리 등이 담겼다. 법이 일몰된 후엔 기업이 자체적인 구조개편에 나섰다.

구조조정에만 그치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당시 회사마다 특정 제품 생산에 주력할 수 있도록 법 지원에 나섰다. 1999년 산업활력법, 2014년 산업경쟁력강화법이 대표적이다. 제품별 생산능력이 각 기업에 집중되면서 선도기업이 나오기 시작했다. PP에선 2003년 통합 설립된 일본폴리프로가, PE에선 그 해 JV로 설립된 일본폴리에틸렌이 1위 지위를 굳혔다.

폐쇄한 설비가 있던 자리는 각 지역 특성에 맞게 용도를 전환했다. 그 결과 10여년이 지난 현재 주요 화학업체들이 고부가 신사업에서 벌어들인 영업이익이 범용 제품을 뛰어넘는 수준에 이르렀다. 미쓰비시는 산업용 가스·헬스케어 사업에 나섰는데 그 비중이 작년 96%에 달했다. 신에쓰화학의 반도체 소재사업 비중은 51%, 아사히의 바이오 헬스케어 비중은 43%에 이르렀다.

정부 주도로 사업통합을 택한 일본과 달리 한국은 각 기업들의 '각자도생'에 의존하고 있다. 불황에 직면해서야 기업들은 너나없이 공장 매각에 나서고 있다. LG화학은 여수의 NCC 2공장 구조조정 계획에서 더 나아가 화학사업을 물적분할한 후 신설법인 지분 일부를 쿠웨이트 석유공사(KPC)에 매각하는 안을 추진하고 있다. 롯데케미칼은 말레이시아 자회사 LC타이탄 지분 매각에 돌입했다.

화학업계 관계자는 "과감한 구조조정을 선택한 일본의 사례에서 해법을 찾을 필요가 있다"며 "현재 매물로 내놓아도 사갈 데가 없고, 매각에 성공해도 개별기업 유동성 확보에 도움이 될뿐 산업 전반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하지은 / 차준호 기자 hazzy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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