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속담이다. 서양 속담은 좀 다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가르침에서 유래했다. 그의 저서 ‘연설록’에는 ‘받은 은혜는 영원히 기억하고, 겪은 원한은 흐르는 물처럼 잊어버려라’라고 나온다. 아버지에게 저 속담을 배웠다. 직장으로 전화한 아버지가 퇴근 후 지인 모친상에 문상을 같이 가자고 했다. 서둘러 일을 마치고 택시로 혜화동 상가에 가면서 아버지는 부의금 봉투를 가져왔느냐고 했다. 어찌 될지 몰라 봉투 두 개를 준비해왔다고 했다. 아버지는 ‘향전(香奠)’이라 쓴 봉투를 내보이며 “내 것은 준비해왔다”라며 “네 것은 네가 준비하라”라고 했다.
겉봉에 뭐라고 써야 할지 몰라 흰 봉투를 내밀자 직접 쓰라고 해 흔들리는 택시 안에서 손을 붙잡아 ‘부의(賻儀)’라고 쓰고 내 이름을 뒷면에 썼다. 아버지는 두 가지를 바로 지적했다. 부의는 반가(班家)에서는 잘 쓰지 않는 표현이다. 양반은 ‘상제(喪祭)’ 또는 ‘상금(喪金)’을 썼다. 그게 아니면 ‘향전(香奠)’을 써야 한다고 해 그 자리서 고쳐 썼다. 또 이름 마지막 자 ‘권세 권(權)’을 약자인 ‘권(?)’으로 쓰자 “제 이름을 약자로 쓰는 놈이 어딨느냐. 제 이름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데 남이 귀하게 여기겠느냐”며 이름은 반드시 정자로 쓰라고 했다.
“봉투에 돈은 얼마를 넣을까요”라고 묻자 아버지는 “형편대로 하라”고 했다. 이어 “형편이 안 되면 빈 봉투를 낼 수도 있다.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위인이라면 사귀지 말라. 저쪽에서 내 경조사에 냈던 금액에 맞춰 내는 건 거래다”라고 지적했다. 아버지는 “오늘 문상 가 뵙게 될 분은 내 스승이다. 공직에 오래 계셨다. 네 할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문상 와 처음 뵈었다. 전상으로 다리를 잃어 낀 내 의족을 어루만지며 ‘용기 잃지 마라. 내가 도움이 돼줘야할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오라’며 힘을 주신 분이다. 연유는 잘 모르겠지만, 평소 왕래가 없던 분이 조문을 오셨다”라고 일러 주며 그 은혜를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다른 사람의 도움과 은혜는 우리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 특히 저 어른은 그날 이후 어려운 결정을 해야 할 때마다 찾아뵙고 가르침을 받은 내 은인이다. 은혜는 기억하고 보답해야 한다”며 “은혜는 바위에 새기고 원한은 냇물에 새겨라”라고 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보답하는 것은 덕목이며 돈으로 환산하는 건 옳지 못하다. 은혜는 은혜로 갚아야 한다”고 강조하며 설명했다. ‘은혜 은(恩)’자는 침대에 大(큰 대)로 누워있는 사람을 그려 ‘의지하다’란 뜻을 지닌 ‘인할 인(因)’자와 ‘마음 심(心)’자가 결합한 글자이다. ‘의지(因)가 되는 마음(心)’이라는 뜻이다. ‘은혜 혜(惠)’자는 ‘마음 심(心)’자와 실을 감아두던 ‘방추(紡錘)’를 돌리는 ‘오로지 전(專)’이 합친 글자다. 실을 푸는 모습을 그린 전(專)자에 심(心)자를 결합해 선한 마음을 베푼다는 뜻을 표현했다.
아버지는 “그렇게 한자에도 온통 선한 마음을 베푸는 글자로 된 은혜의 보답을 돈으로 환산하려는 얕은 수작은 절대 해서는 안 된다”고 명심하기를 당부했다. 조문을 마치고 아버지가 “나랏일을 오래 하신 큰 어른”이라고 소개했다. 명함을 드리자 꼼꼼하게 살핀 그분은 내 아버지에게 했던 말씀을 녹음기처럼 들려줬다. “은행에 잘 들어갔다. 축하한다. 지금은 어렵겠지만 허드렛일이라도 정성을 쏟아라. 혹 내가 도움이 될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찾아와라.”
두어 시간 머무르는 동안 본 문상객은 적었다. 아버지께 말씀드리자 “공직에서 물러난 뒤라 그럴 거다. 그 사람들은 시장에서 장 보러 왔다가 장 다 본 뒤 돌아간 사람들이다. 세상인심이란 그런 거다”라며 중국 전국시대 말기의 정치인인 ‘맹상군(孟嘗君)’의 고사를 집에 오는 차 안에서 일러줬다. 맹상군은 재산을 털어 천하의 인재를 후하게 대우해 삼천 명의 식객을 거느렸으나 그가 감옥에 갇히자 모두 떠났다. 그때 마지막까지 남아 보좌하던 문객 풍환(馮驩)이 한 말이다. 아버지는 “은혜는 그렇게 장보듯해서는 안 된다”고 엄명했다.
이날도 마지막에 ‘이덕보원(以德報怨)’ 고사성어를 인용했다. 은혜로 원한을 갚는다는 뜻으로 《논어(論語》 〈헌문(憲問)〉편 제36장에 나온다.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은혜로 원한을 갚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공자가 말했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은혜에 보답할 것인가. 정직함으로써 원한을 갚고 은혜로써 은혜를 갚아야 한다’[‘以德報怨 何如?’ 子曰 ‘何以報德 以直報怨 以德報德’].” 공자는 자신이 생각하는 은혜와 원한을 갚는 옳은 방법은, 원한에는 정직함으로써 갚고 은혜에는 은혜로써 갚는 것이라고 하였다. 원망스러운 상대에게 오히려 너른 마음으로 사랑과 은혜를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갖추어야 할 인성은 여러 가지다. “감사하는 마음, 긍정적인 사고방식, 베푸는 마음 등을 갖추어야 한다”며 그러자면 “겸손, 배려심, 책임감”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아버지는 “진실성은 감사하는 마음을 진심으로 표현하는 데 중요하다. 가식이나 거짓말 없이 진심 어린 감사를 표현함으로써, 은혜를 베풀어 준 사람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만들 수 있다”라며 새겨두라고 했다. 진실성이야말로 값으로 매길 수 없는 인성이고 손주들에게도 꼭 물려줘야 할 소중한 성품이다.
<한경닷컴 The Lifeist> 조성권 국민대 경영대학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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