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전 위원장은 "흔히 대한제국과 고종 황제는 그저 ‘무기력한 나라, 무능한 군주’로만 알고 있고 한때 국사 시간에도 그렇게 배웠던 시절이 있었으나 대한제국을 일제가 무능한 나라로 왜곡한 것은 식민통치의 합리화를 위해서였다"고 주장했다.
이 전위원장은 "고종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기 전에 광무개혁으로 대한제국의 근대화는 자력으로 이미 진행 중이었기에 일제는 그걸 부인해야 했다"며 "조선이 괜찮은 나라였다면 식민지배가 정당화될 수 없어 ‘망국책임론’이란 프레임을 씌웠다"고 밝혔다.
그는 "첫째는 고종 정부의 무능함, 둘째는 유교 사상 때문에 조선이 망했다는 것으로 구시대 사상인 유교에 의해 다스려지는 나라는 야만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주장이 한때 한국 사학계를 주름잡던 식민사관 역사론이었다"며 "2000년대를 기점으로 대한제국 시기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대중적 인식은 아직 낮다는 생각에, 순종황제의 순방이 이토 히로부미를 통감에서 사임하게 한 의의에 대해 학술적 견지에서 기고를 보냈다"고 강조했다.
【기고】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사임시킨 순종 황제의 순행
갑자기 대구 ‘순종 황제 어가길’융희 황제 동상 철거 소식을 접했다. 1909년 1~2월 순종 황제의 남순(南巡), 서순(西巡)의 역사에서 대구는 첫 행재소 (行在所)였다. 대구의 구 철도역사를 이용해 순종 황제 순행 기념관을 만든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 엊그제 같다. 그새 많은 돈을 들여 세운 황제의 동상이 교통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철거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세상에 어찌 이런 문화 행정이 있단 말인가? 아무리 망국의 황제라고 하더라도 한 나라를 대표한 국가 원수의 동상을 세웠다 헐었다 하기를 마음대로 하려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권능의 소지자들인가?
1926년 6월 10일 순종 황제 국장 때 일어난 6·10 만세운동을 기억하는 사람이 그곳에는 없다는 말인가? 고종, 순종은 언젠가부터 망국의 책임 ‘원흉’으로 간주해 제멋대로 도마에 올리는 풍조가 만연하고 있다. 1919년 3월 1일, 1926년 6월 10일 두 차례 황제의 죽음을 애도하는 인파가 대한문과 돈화문 앞에 모여 부른 만세 함성의 역사는 결코 아무나 흔들어 놓을 대상이 아니다.
1909년 1, 2월의 순종 황제의 순행(巡幸)은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구상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순종은 결코 굴종해 나선 꼭두각시가 아니었다. 이토는 1907년 7월 헤이그 특사 파견 문책 구실로 광무제 (고종)를 강제 퇴위시키고 군대해산 조치까지 취했다. 이에 전국 방방곡곡 의병이 일어나 항일 투쟁을 벌였다. 통감 이토는 의병 진압에 골머리를 앓았다. 일본군 통계에 따르면 1908년 한해 의병과 벌인 전투회수 1452회, 참전 의병 수 6만9832명에 달했다. (모리야마 시게노리, 『일한병합』, 1992, 171~172쪽) 통감 이토는 이 저항을 진정시켜보려고 순종 황제에게 기차를 이용한 순행을 제안하였다.
남쪽으로 가는 순행은 1월 7일 남대문 정거장을 출발해서 오후 3시에 대구에 도착해 1박하고 8일부터 11일까지 부산, 마산을 순방한 뒤 11일 오전 11시 45분 대구로 돌아와 다시 1박하고 12일 상경하는 순서로 진행되었다. 황제 일행이 도착한 정거장에는 공사립 학교 학생을 비롯해 시민들이 길을 메웠다. 대형 녹문(綠門)을 세우고 태극기가 나부끼는 가운데 시민들이 연도에 나와 만세를 불렀다. 밤에는 폭죽이 하늘에 솟아 날고 제등 행렬이 밤을 수놓았다. 『황성신문』은 환영인파의 수가 대구 2천, 부산에서는 학생과 내외국 인민이 항구를 가득 메웠다고 하고 마산에서는 3만에 달했다고 보도했다.
9일 오전 10시 마산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황제를 기함 아쓰마(吾妻) 함으로 안내했다. 일본의 해군력을 과시하기 위한 승선 행사였다. 이때 항구의 시민들이 5~6척의 배를 달리어 황제가 탄 전마선을 둘러싸고 호위하면서 큰 소리로 “폐하가 만약 일본으로 가시면 신들은 일제히 바다에 뛰어들어 죽겠으며 차마 우리 임금이 포로가 되는 것을 보지 못하겠다”라고 외쳤다. 1년여 전 이토 히로부미가 영친왕을 인질로 일본으로 데려갔던 일이 지금 또 일어나는 것 아닌가 우려하는 외침이었다. 『매천야록』의 「의보(義報)」가 전하는 광경이다.
12일 부산을 떠나 상경하면서 대구에서 다시 1박 할 때 현재 동상과 관련된 역사가 몇 가지 생겼다. 황제는 도착하자 바로 달성공원을 순찰하고 여기서 각 학교 운동회를 직접 보고 관찰사를 비롯한 관리들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교육과 실업 장려에 쓸 돈으로 7000원을 내렸다. 대구시야말로 기념할 만한 역사다. 1897년 독립협회 건립 때 왕실이 낸 3000원보다 배가 넘는다.
황제는 처음부터 기차가 지나는 고을의 역대 충신들의 사당에 관리를 보내 제사를 올리는 행사를 병행시켰다. 노량진의 사육신 사당을 비롯해 이순신, 조헌, 정발, 송상현 등 임진왜란 영웅들에게 모두 제사를 올리게 했다.
서순은 1월 27일부터 2월 3일까지 8일간 이뤄졌다. 1월 27일 오전 8시 남대문 정거장을 출발해 오후 3시 45분에 평양에 도착하여 1박 한 후, 이튿날 신의주로 갔다. 『황성신문』은 평양의 환영 인파가 “10만을 내려가지 않았다”라고 보도했다. 평양의 녹문 아치는 10여 개나 되고 ‘대황제 만세’라고 쓴 현수막도 내걸렸다. 29~30일 의주에서 행사는 심한 추위 속에 이루어졌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파천 중에 머물던 통군정을 비롯한 장소들을 찾았다. 관, 사립 학교 학생들을 비롯해 1만5000을 헤아리는 군중이 황제의 뒤를 따랐다. 돌아오는 길에 정주 역에서는 오산학교를 세운 이승훈을 찾아서 특별히 격려했다. 서순에서도 26명의 역대 충신 사당에 관리를 보내 제사를 올리고 기자, 동명왕, 단군, 을지문덕 등의 사당에 제사를 올렸다.
돌아오는 길에 개성의 환영 또한 성대했다. 연로 좌우에 늘어서 만세를 부르는 “환영 인원수는 10만 명”에 달했다. 2월 3일 오전 8시, 서울에서 의친왕이 내려와 황제를 알현한 뒤 함께 만월대로 갔다. 이토 히로부미는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서 통감 사임을 결심했다. 두 차례의 순행에서 목격한 한국인의 황제에 대한 충성이 연출한 장면들을 보면서 자신의 보호국 정책이 실패한 것을 자인했다. 일찍부터 ‘병합’을 주장한 군부 세력에 넘기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다.
서울로 돌아온 이틀 뒤 2월 5일 자 신문에 ‘이토 통감 귀조(歸朝)’ 즉 통감이 일본으로 돌아간다는 보도가 나왔다. 이토는 2월 8일 황제에게 인사를 하고 서울을 떠났다. 부통감 소네 아라스케가 잠시 뒤를 이었으나 1910년 3월 3대 통감이 된 육군대장 데라우치 마사다케는 창덕궁 안에 경찰서를 설치했다. 궁 안 낙선재의 순종 황제가 외부와 접촉하는 것을 차단하는 조치였다. 1926년까지 계속되는 유폐의 시작이다.
이토 히로부미가 구상한 황제의 순행은 이토의 사임으로 끝났다. 황제와 신민이 만나 분출한 뜨거운 항일의 열기가 자아낸 역사다. 의병들도 순행 기간에는 총을 내려놓았다가 이토가 떠난 뒤 다시 총을 들었다. 순행의 항일 역사 진실이 대구시 중구의 조치를 재고하게 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전 국사편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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