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동휘의 재계 인사이드] "기술 모르면 배임" 허태수의 절박함

입력 2024-04-23 17:43   수정 2024-04-24 00:21

“기술을 모르면 배임이다.” 허태수 GS그룹 회장(사진)이 요즘 계열사 사장들에게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다. GS홈쇼핑 대표 시절부터 미국과 중국 스타트업에 고루 투자한 허 회장은 글로벌 테크 현장에서 ‘빅샷’을 많이 만나는 기업인 중 한 명이다. 작년엔 세계 1위 전기차 기업인 중국 비야디(BYD)의 왕첸푸 회장과 만났다.

이달 말 사장단 회의는 아예 미국 시애틀에서 열기로 했다. 마이크로소프트(MS)와 아마존웹서비스(AWS)를 방문해 인공지능(AI) 클라우드 전문가가 소개하는 최신 기술 현황을 들을 예정이다. MS와 아마존이 GS그룹을 고객으로 유치하려고 만든 자리겠지만, 아마도 허 회장은 또 다른 효과를 노리고 있을 것이다. 물건을 팔려는 이가 상세하게 설명하는 내용을 고스란히 흡수해 GS그룹의 AI 활성화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감을 잡으려는 의도다.
'한국 장점'의 붕괴
허 회장의 테크놀로지에 대한 열정은 인사에 그대로 드러난다. ㈜GS의 최고재무책임자(CFO)인 이태형 부사장은 서울대 화학공학과 출신이다. 인천종합에너지 대표를 맡았던 에너지 전문가다. 허 회장의 해외 출장에 늘 동행하며 사실상 ‘비서실장’ 역할을 하고 있는 최누리 업무지원팀장(전무)은 KAIST 기계공학과를 졸업했다. 삼성전자 근무 경력이 있어 디지털에도 특화돼 있다. 이 부사장과 최 전무는 계열사 임원들을 대상으로 일종의 ‘기술 통역사’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허 회장이 기술에 집착하는 데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에너지와 건설, 유통을 주력으로 삼은 GS그룹은 다른 그룹에 비해 연구개발(R&D)에 많은 돈을 투자할 필요가 없었다. 해외에서 라이선스를 가져와 설계도대로 공장을 짓고, 운영 효율을 극대화함으로써 연간 수조원의 이익을 창출했다.

GS그룹의 사례는 사실 한국 제조업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소위 ‘중후장대’ 산업은 ‘캐펙스(CAPEX) 투자’만으로도 글로벌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시설 투자 자금을 모아 적기에 돈을 쏟아부은 뒤 근면성실하고, 손재주 좋고, 머리 좋은 K노동력으로 세계를 호령했다.
미·중 두 개의 '태양'
허 회장은 R&D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스타트업 투자를 택했다. 자체 R&D 실력을 끌어올리려면 돈도 문제지만, 기술 지체 현상을 극복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미국에선 주로 새로운 기술을 선보인 혁신 스타트업을 골랐다. 중국 투자는 신기술을 상용화할 역량이 있는 곳에 집중했다. 미국과 중국의 장점을 이으면 동남아시아 등 신흥 시장에서 GS그룹만의 비즈니스를 펼칠 기회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허 회장의 전략은 최근 어려움에 봉착했다. 미국과 중국을 잇던 밸류체인이 끊어지면서 둘 중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게다가 신규 사업이라고 해서 들여다보면 어디든 중국 업체가 똬리를 틀고 있다. 중국 기업들이 정부 보조금을 앞세워 인해전술로 밀어붙이면 신규 사업도 몇 년 안에 레드오션으로 돌변할 게 뻔하다는 것이 GS그룹의 고민이다.

이 같은 어려움에도 GS그룹은 쉼 없이 원천 기술을 찾아다니고 있다. 과거와 달라진 건 좀 더 정교하게 밸류체인을 탐색한다는 점이다. 예전엔 지나쳤던 밸류체인의 세세한 부분을 깊게 파고들면서 중국이 파상 공세를 펴기 전에 안전한 ‘해자’를 구축할 수 있는 영역을 탐색 중이다. 미·중 갈등에서 살아남으려는 기업인의 고뇌를 보고 있자니 우리 정치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된다. 기술을 모르는 기업인은 주주에 대한 배임일 뿐이지만, 기술을 외면하는 정치는 국민에 대한 배임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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