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실리콘밸리 줌인센터’는 이 지역의 창업자, 최고경영자(CEO), 엔지니어, 직원 등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습니다. 인물을 ‘줌인(zoom in)’해 그들의 성공, 좌절, 극복과정을 들여다보고 지역의 ‘주민’으로서 살아가는 이야기도 들어봅니다. 앞으로 줌인센터에 가능한 많은 주민을 초대하고자 합니다.</i>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차로 2시간 거리에 세계적인 와인 생산지 나파밸리가 있습니다. 이곳에서 17년 넘게 와인업계에 종사하며 여러 혁신을 이뤄낸 한국인 와인메이커가 있습니다. 세실 박 와인포니아 대표입니다. 대학 졸업 후 와인업계 뛰어들어 나파밸리에 뿌리를 내린 세실 박 대표에게 와인이야기와 창업정신에 대해 들어봤습니다.
Q. 간단한 자기소개를 해주세요.
A. 나파밸리 한인 여성 최초 와인메이커 그리고 빈야드 농장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는 세실 박입니다. 와인포니아라는 회사를 통해서 컨설팅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직접 론칭한 와인 브랜드 ‘이노바투스’의 와인 메이커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Q. 이노바투스 와인에 대해 좀 더 설명해주세요.
A. 이노바투스 브랜드는 2014년에 런칭했습니다. 올해가 10주년입니다. 메인 품종은 카베르네 소비뇽, 그리고 ‘큐베’라는 레드 블랜드가 있고요. 비오니에 화이트 품종도 있습니다. 생산량은 한 해에 800~1200케이스 정도입니다. 한 케이스에 12병 정도 들어 있으니 1만~1만4000병 정도 생산합니다. 와인은 주로 미국에서 판매되고요. 중국, 한국, 일본에 수출하고 있습니다. 현재 싱가포르와 캐나다, 영국 쪽에 론칭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Q. 이노바투스가 올해로 10주년을 맞았습니다. 감회가 어떠신지요.
A. 저는 2007년에 와인 메이킹을 처음 시작했습니다. 이때 제가 다짐한 건 ‘앞으로 10년을 버텨보자’는 것이었습니다. 나파밸리라는 아무런 연고도 없는 땅이 혼자 와 시작했기 때문에 버티는 것만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후 제 브랜드를 론칭한 게 2014년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10년을 살아온 셈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노바투스는 제 인생의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와인업계에 제 와인이 자리를 잡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뿌듯합니다.
Q. 이노바투스라는 브랜드는 어떻게 짓게 됐나요?
A. 오늘날의 나파밸리를 있게 한 로버트 몬다비를 생각하며 지었습니다. 로버트 몬다비는 이탈리아의 이민자거든요. 이민자가 낯선 땅에 와서 나파밸리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그는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고, 품질과 기술력을 높이기 위해서 노력했는데요. 몬다비의 혁신적인 사고와 정신을 기리는 마음을 담아 이노바투스라는 이름을 지었습니다.
Q. 와인의 어떤 매력이 대표님을 나파밸리로 끌어들였나요.
A. 저는 대학에서 생명 식품 생명공학을 전공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엔 와인 제조 부분에 되게 관심이 많았습니다. ‘발효 음식을 이렇게 아름답게 만들 수가 있구나’라고 생각했죠. 제조 공정에 굉장히 관심이 많아서 와인을 시작하게 됐는데요. US데이비스에서 와인을 공부할 때 와인 메이킹 과정 절반, 빈야드 즉 농업 부문이 절반이었습니다. 학교를 졸업하면서 농장 부분을 더 많이 알아가게 됐습니다. 현재는 제조 부분과 함께 농업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좀 더 자연에 가깝게 접근하고 있고요. 끊임없이 변하는 자연에 더 매료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나파밸리에 몸담은 것 같아요.
Q. 나파밸리는 세계적인 와인 생산지인 만큼 한국인, 여성으로서 정착 과정이 쉽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A. 처음에 나파밸리에 들어왔을 때는 이곳은 너무나 아름다운 숲 같았었어요. 당시 저는 ‘나는 이런 울창하고 모든 것이 다 갖춰진 완벽한 아름다운 숲에 떨어진 잡초다’라고 생각했어요. 초창기에는 영어와 지식도 부족했고, 와인에 대한 문화도 익숙하지 않았는데요. 잡초같이 자라면서 매일매일 양분과 햇빛을 따라서 자리를 찾아가려고 노력했거든요. 잡초와 같은 생명력으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저를 지금 이 자리까지 이끌어 준 것 같습니다.
Q. 이노바투스의 ‘쿠베’ 와인이 독특한 개성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는데요. 어떻게 이런 평가를 받을 수 있었나요?
A. 쿠베는 흥미로운 와인입니다.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전통적인 와인 생산지 그들만의 전통 방식이 있는데요. 와인을 블렌딩할 때 자기 지역에서 나오는 포도 품종을 사용합니다. 저는 전통적인 룰을 따르지 않았어요, 프랑스 보르도 지역의 한 품종인 시라즈와 부르고뉴 지역의 한 품종인 피노누아를 선택해 블렌딩 했죠.
이런 시도를 아무도 못 할 일은 아니지만, 그 문화적으로 이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죠. 그런데 두 품종을 블렌딩해보니 너무나 멋진 매력을 가진 와인으로 탄생했습니다. 시라즈의 진하고 강한 맛과 향이 피노누아의 화려하고 섬세한 풍미를 만나 새로운 맛을 낸 것이죠.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건 제가 아무런 백그라운드 없이, 전통에 얽매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같아요. 잡초 같은 자세에서 나왔는데 더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이죠.
Q. 와인 메이커 외에 다른 일은 어떤 것을 하시나요?
A. 일반적으로 와이너리라고 하면 포도밭과 와인 주조장이 같이 있는 것을 떠올리죠. 근데 실제로 나파밸리는 보면 생산시설 없이 포도밭만 있는 농가도 많습니다. 포도농사를 지어 와인메이커에 판매하는 방식인거죠. 이때 밭에서 포도를 관리하는 데 전문적인 기술이 필요합니다. 저는 학교를 다니면서 빈야드를 관리하는 자격을 획득했습니다. 현재 80개의 포도밭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Q. 올해의 계획, 중장기 비전은 무엇입니까.
A. 한국의 농업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제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한국에 굉장히 우수한 농업 방식들이 있습니다. 보다 자연 친화적이고 환경을 생각하는 방식인데요. 이를 나파밸리에 도입해 보려 합니다. K-뷰티, K-드라마, K-무비 등이 있는데 저는 K-파밍(농업)을 나파밸리에 소개하고 싶어요. 이 작업을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할 예정입니다.
Q. 한국인의 정체성을 담은 와인도 만들 생각이신가요?
A. 생각을 많이 하고 있어요. 제가 이곳에 17년 넘게 살고 있지만 저 역시 한국인의 영혼을 갖고 있기 때문이죠. 이를 와인에 좀 더 담아낼 수 있도록 하고 싶습니다. 와인 브랜딩 등 여러 방안을 두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Q. 세계적으로 최근 와인 공급 초과로 인해 업계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나파밸리도 이를 체감하나요.
A. 팬데믹 기간 와인 수요가 굉장히 늘어나자 와인 업계에서 공급량을 늘렸는데 현재는 수요가 감소한 상황입니다. 줄어든 수요에 비해 공급이 과잉 현상을 겪고 있습니다. 그런 면 때문에 와이너리마다 크고 작은 어려움은 있겠죠. 이를 다 수용할 곳을 찾아야 하니까요. 와인업계에선 새로운 와인 수요를 창출할 시장을 찾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시아 여러 곳에 진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Q. 좋은 와인이란 무엇입니까.
A. 좋은 와인은 나와 주변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해주는 와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가격을 떠나서 그냥 마셨을 때 기분이 좋아지면 되는 것이죠. 좋은 와인을 마시면서 사람들과 행복을 나누고, 잠도 잘 자는 선순환을 만들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겁니다.
Q. 와인 업계에 종사하고 싶은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A. 하고 싶다면 도전하세요. 그냥 하시면 됩니다. 저도 했는데, 누구나 원한다면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와인 공부를 시작할 때는 정보가 없었는데, 지금은 좋은 정보들을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배우고자 하는 의지가 있으면 얼마든지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해요. 결코 쉬운 건 아니지만 와인을 사랑한다면 충분히 도전해 볼 가치가 있습니다.
나파밸리=최진석 특파원 iskra@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