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다 메모에 대한 개인적 경험으로 화제가 옮겨갔다. 그분은 메모광 수준이었다. 샤워하다가도 벌거벗은 채 뛰쳐나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한다. 그분의 휴대폰 메모 앱에는 다양한 카테고리별로 수많은 방이 일목요연하게 정렬돼 있었다. 그 방을 ‘서랍’이라고 표현한 게 인상적이었다. 일하다가 막히거나 무언가 삶이 답답하면 그 서랍을 열어본다고 했다. 그 서랍이 그분에겐 창작과 성찰의 보물창고였다.
그러다 수년 전에 읽은 인상적인 책 제목이 떠올라 이야기했더니 그분이 공감하며 또 메모했다. <퍼스트 클래스 승객은 펜을 빌리지 않는다>는 일본에서 베스트셀러였다고 한다. 저자는 16년 동안 국제선 일등석을 담당했던 일본 여성 승무원이다. 그는 성공한 사람들의 밀도가 가장 높은 공간에서 일하면서 그들에게는 공통된 남다른 습관 몇 가지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중 하나가 지독한 메모 습관이다. 입국서류 작성으로 분주한 시간, 다들 승무원에게 펜을 빌리느라 바쁘지만, 일등석 승객은 펜을 빌리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자신만의 필기구와 손바닥만 한 수첩을 지니고 다녔기 때문이다. 책은 수많은 천재와 성공한 이들이 메모광이었다고 소개한다. 존 레넌은 비행기 안에서 갑자기 떠오른 가사와 멜로디를 메모지에 적었다. 그 메모로 불후의 명곡 ‘이매진(Imagine)’이 탄생했다. 17세기 영국의 정치철학자 토머스 홉스는 아예 손잡이에 펜과 잉크병을 넣을 수 있는 산책용 지팡이를 특별 제작해 갖고 다녔다고 한다.
앞서 말한 그분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나도 메모하는 습관이 있는 편이다. 이동하거나 회의 중에 떠오르는 생각을 주저 없이 휴대폰에 적어 놓는다. 출근하면 책상에 앉아 혼자 차 한 잔 마시며 오늘 할 일과 마음가짐, 직원에게 하고 싶은 말을 포스트잇에 적어 데스크 다이어리에 붙여놓는 건 오래된 모닝 루틴이다. 한때 ‘적자생존’이란 말이 유행했지만 메모하는 직원을 보면 왠지 신뢰가 더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메모는 단순히 기억을 뛰어넘어 놀라운 힘이 있음을 가끔 개인적으로 체험하곤 한다. 메모하는 그 짧은 순간에 머릿속 안개가 걷히고, 창의적 생각이 솟아나고, 나 자신을 돌아보는 경험을 한 적이 적지 않다. 삶의 변화를 꿈꾸는 누군가가 있다면 나는 서슴없이 “메모하세요”라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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