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감독원과 한국거래소 등 유관기관들이 불법 공매도를 차단할 수 있는 새 전산화 방안을 마련했다. 지난 수년간 공매도 전산화 논의가 공회전한 결과 '공매도 전산화는 사실상 이루기 어려운 일'이라고 알려진 것과는 확 달라진 모양새다.
"공매도 주문 전후 다중 체크 시스템 도입"
25일 금융감독원은 글로벌 투자은행(IB) 등 기관투자가와 증권사, 한국거래소를 비롯한 다중 검증 기반 불법 공매도 방지 전산시스템 구축안을 발표했다.새 공매도 전산화안은 공매도잔고 보고를 하는 모든 기관투자가의 주문 처리 과정을 자체 전산화하고, 한국거래소는 별도로 이들의 잔고를 집계해 검증하는 방식이 골자다. 공매도 주문이 나가기 전엔 기관이 자체적으로 무차입공매도를 방지하고, 주문이 나간 뒤엔 거래소가 혹시 모를 오류 등을 즉각 잡아낼 수 있게 한다는 얘기다.
기존엔 공매도를 치려는 글로벌 투자은행(IB) 등 기관이 메신저나 이메일, 전화 등을 통해 주식 차입 계약을 한 뒤 중개기관 시스템에 차입 내역을 수기로 입력했다. 이후 기관이 한국거래소에 직접 공매도 주문을 넣거나, 증권사에 주문을 위탁해 처리하는 방식으로 거래가 이뤄졌다. 주식을 차입했다는 내용 증빙도 단순 메모나 스크린샷 저장본을 통했다. 이같은 과정을 '검증 가능한 전산 프로세스'로 바꾼다는 게 금감원의 계획이다.
2020년엔 '사실상 불가능'…뭐가 바뀌었나
이전과는 크게 다른 움직임이다. 금융감독당국과 유관기관, 국회 등은 2018년과 2020년에도 전문가들과 함께 공매도 전산화 논의를 벌였다. 당시엔 불법 공매도 주문을 차단·모니터링하는 시스템 구축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결론냈다. 이후 증권시장 유관기관들이 발간한 '공매도 사실은 이렇습니다' 등 문건을 통해서도 불법공매도 사전차단시스템을 비롯한 전산화 방안이 현실적이지 않다는 입장을 견지해왔다.
앞서 당국과 전문가 등이 '현실적으로 불가능' 결론을 낸 것은 외국계 IB 등 기관투자가를 관리망에 넣을 뾰족한 수를 찾지 못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대규모 불법 공매도는 대부분 국내에 근거지를 두지 않은 해외 IB와 자산운용사 등을 통해 이뤄진다.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작년 초부터 8개월간 금융위가 부과한 무차입 공매도 과태료·과징금 중 92%는 외국계 회사에 부과됐다.
당시엔 외국계 IB와 국내 증권사, 한국거래소 등을 하나로 통합해 아우르는 주식대차·공매도 거래 플랫폼 등이 전산화 방안으로 거론됐던 영향이 컸다.
해당 논의에 참여했던 한 금융당국 관계자는 "외국 IB의 대차 거래는 대부분이 국외에서 각기 다른 플랫폼을 통해 이뤄지기 때문에 외국인이 굳이 한국 전용 대차시스템을 별도로 선택할 이유가 없다"며 "제삼자인 한국 당국이 각 민간주체의 내부 거래 내역과 잔고 등을 전부 들여다 볼 수는 없다는 것도 딜레마였다"고 설명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증권사 관계자는 "국내 증권사들은 감독당국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지만, 국내 감독당국이 국내 증권사에 미치는 것과 같은 정도 영향력을 외국 기관에 발휘할 수는 없다"며 "당시엔 외국계 IB가 잔고 공유 자체를 하지 않을 것이란 전망에 실시간으로 대차 잔고를 통합 모니터링하는 방식은 만들 수 없다는 것이 중론이었다"고 했다.
통합 어려우니 개별 구축해 환류검증…고강도 책임도 부여
반면 이번엔 접근 방향부터가 달랐다. 전체 통합 방식에 얽매이지 않았다는 얘기다. 금감원은 기관에 자체 전산화를 법적 의무화하고, 이들의 데이터·시스템을 수탁 증권사와 한국거래소가 각각 검증하게 할 방침이다. 기관투자가는 자체 전산시스템으로 무차입공매도를 사전 차단하고, 주문 단계에서 걸러내지 못한 무차입공매도가 발생한 경우 거래소의 중앙차단시스템을 통해 자동 적발하는 게 골자다. 기관투자가의 시스템에도, 거래소의 시스템에도 각각 별도로 잔고 데이터가 남는 만큼 무차입 공매도를 적발하기 쉬워진다.
금감원의 이번 안이 계획대로 구현되면 양방간 거래 와중이 아니라 주문이 들어가는 기관 단계에서부터 잔고 범위 안에서만 공매도 주문을 넣도록 할 수 있다. 어길 경우 무차입공매도에 대한 법적책임 뿐 아니라 관리 미비에 대한 책임까지 지울 수 있다. 이복현 금감원장이 이날 "전산기술과 규범을 함께 활용해 공매도를 사전차단할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겠다"고 한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다.
기관투자가와 한국거래소에 각각 시스템을 새로 구축하기 때문에 외국인투자자가 중간에 증권사의 주문 대행 없이 한국거래소에 직접 주문을 넣어 거래하는 주문자동전달시스템(DMA) 방식에서도 잔고관리를 각각 비교검증할 수 있다는 점도 장점이다.
금감원은 각 거래주체간 데이터 처리·이전 단계에서 서로 데이터를 검증하게 만든다는 방침이다. 이같은 시스템을 기반으로 각 기관투자가가 차입거래 입력 시스템까지 고도화하면 사실상 무차입 공매도를 사전에 완전 차단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전산화된 방식으로 차입 계약을 체결해 데이터 처리 이전인 입력 단계부터 오류를 차단하고, 거래별로 증빙 기록을 남기는 식이다. 한국증권대차(옛 트루테크놀로지스) 등이 이같은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잔고 정보 공개 어렵다? 근거 법 조항 추진
금감원은 기관이 공매도 잔고 정보를 외부에 공유하도록 법적근거 또한 마련키로 했다. 무차입 공매도를 단속·검증하려면 개별 기관투자가들의 공매도 순잔고, 차입주식 잔고 정보, 일일 변동내역 등이 꼭 필요해서다. 이는 당초 각 기관투자가들의 내부 데이터로 한국 당국엔 공유하기가 어려울 것이란 게 시장의 예상이었다. 금감원 관계자는 "외국 IB 등도 근거조항이 있다는 전제 하에 잔고를 외부로 공유할 수 있음을 협의 끝에 확인했다"며 "규정 근거만 있다면 기관투자가 본사와 공매도 주문의 실제 수탁자인 헷지펀드 등 클라이언트들도 잔고 등 정보 연동에 이견이 없다"고 설명했다.
각 기관투자가의 보유·대차 물량 중 공매도 거래와 직결된 물량을 파악하기 위해선 한국거래소를 활용한다. 한 증권사 대차거래 담당자는 "기존 예탁결제원의 대차가능 잔고는 공매도 이외 현금담보부거래, 재대여거래용 물량까지 합산한 수치라 공매도만을 위한 데이터로 볼 수는 없다"며 "이를 감안해 기관투자자와 한국거래소가 각각 대차 물량을 집계하도록 시스템을 짠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공매도 가능 잔고 버퍼(안전구간)도 기관투자가 모범규준에 반영한다. 실시간 거래 과정에서 공매도용으로 잡아둔 대차물량 일부가 현금담보부거래에 쓰이는 등 일시적 변동이 생겨 무차입공매도가 발생할 여지를 막기 위해서다. 예컨대 차입물량 10주 중 '버퍼' 2주를 제외한 8주만을 공매도 가능 잔고로 인식하도록 하는 식이다. 내부통제 프로세스를 확립한 일부 글로벌 IB들은 이미 이같은 방식을 활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시장 상황도 도와…'싫으면 국장을 떠나세요'
증권가에선 최근 시장 상황도 금융감독당국에 유리하게 풀렸다고 보고 있다. 최근 중국 증시가 무너지면서 대안 시장을 찾고 있는 외국 기관들이 많아져 당국이 의견을 관철하기가 이전보다 쉬워졌다는 설명이다. 금감원은 작년 11월 공매도 전산시스템 마련 태스크포스(TF)를 발족한 이후 국내외 기관투자자, 증권사 등과 공식 회의만 17차례를 벌였다. 탁상공론이 아니라 법적 제재 가능성, 비용 부담 등 실질적 도입안 논의에 공을 들였다. 이번 조치로 기관투자가들이 새로 구축해야 하는 시스템 비용은 각 기관투자자가 스스로 부담하는 데에도 협의했다.
한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최근 외국 기관투자가들이 부쩍 한국을 찾고 있다"며 "중국에서 비즈니스를 접을 판이다보니 한국에서 사업을 늘리려 하는 이들도 많은 터라 이전보다 더 국내 당국의 방침에 협조적으로 굴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금융감독당국도 계속 강경한 입장을 유지하는 분위기다. 금감원은 새 공매도 전산시스템 계획안을 놓고 다음달 중 해외에 본사가 있는 투자은행(IB) 등의 의견을 홍콩 현지에서 직접 청취할 예정이다. 이 과정에서도 기관투자가에 대한 전산 시스템 마련 방침이 느슨해지진 않을 것이란 게 금융투자업계 안팎의 중론이다.
금감원 관계자는 "그간 한국 증시에서 악의적 공매도를 벌였던 투기자본들은 시스템 구축에 따라 국내 증시에서 나가야 할 것"이라며 "이들은 증시 건전성을 갉아먹는 세력인 만큼 국내 증시에 타격을 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고 단언했다.
선한결 기자 alway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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