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숫자 빠진 '연금 개혁' 논의

입력 2024-05-01 18:03   수정 2024-05-02 00:13

때로는 글자 한 자, 숫자 하나에 목숨을 거는 일이 발생한다. 서구 종교·철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벌어졌던 ‘이오타 논쟁’이 대표적인 사례다. 희랍어(고대 그리스어) 단어 ‘호모우시오스’(동일한)와 ‘호모이우시오스’(유사한)는 영문자 아이(i)에 해당하는 희랍어 철자 이오타(ι)가 있고 없고만 다를 뿐이었다. 하지만 이 미세한 차이는 예수가 ‘신과 동일한’ 신성(神性)을 지닌 존재인지, 아니면 ‘신과 유사한’ 인간에 불과한지를 가르는 기준이 됐다. 스펠링 하나를 두고 ‘정통’과 ‘이단’, ‘삶’과 ‘죽음’이 엇갈렸다.
데이터 외면한 결정
흔히 무지몽매하다고 치부되는 고대 세계에서도 이처럼 작은 차이를 두고 존망을 건 논쟁을 벌였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합리성의 시대라는 현대에 객관적 근거가 무시되고, 팩트가 배제되는 일이 다반사로 벌어지고 있다.

지난달 22일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 산하 공론화위원회 시민대표단이 소위 ‘더 내고 더 받는’ 국민연금 개혁안(소득보장안)의 손을 들어주는 과정도 그랬다. 구체적 숫자에 기반한 경제와 재정의 논리는 들어설 틈이 없었다.

시민대표단이 선택한 ‘소득보장안’은 보험료를 9%에서 13%로, 소득대체율(생애소득 대비 노후연금 비율)을 40%에서 50%로 올리는 게 골자다. 이 안을 적용하면 기금 소진 시기를 2055년에서 2061년으로 고작 6년 늦출 뿐이다. 향후 70년간 누적 적자가 오히려 702조원 더 늘어난다. 2078년 미래 세대는 소득의 43.2%를 보험료로 내야 한다. 전형적인 조삼모사식 개악이다.

어떻게 이런 결론이 다수결을 거쳐 도출됐을까. 숫자를 꼼꼼하게 살펴보지 않은 탓이 크다. 3주라는 짧은 학습 기간 시민대표단에 주어진 자료에는 재정수지 전망 관련 지표가 대거 제외됐다. 앞으로 70년간 연금 상황이 연도별로 어떻게 변하는지도 보지 못한 채, 기금이 고갈된 후 출생 연도에 따라 세대별로 보험료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판단할 근거도 도외시한 채 ‘갈 길’을 덜컥 정해버렸다.

그나마 주어진 자료도 편향됐다. 70년간 적자를 702조원 늘리는 안에는 ‘지속 가능한 안’이라는 선택을 유도하는 이름을 붙인 반면 적자를 1970조원 줄이는 ‘재정안정안’은 이름 없는 서자 취급을 받았다. ‘기존보다 조금 더 내고 그보다 더 많이 받는 안’을 ‘더 내고 더 받는 안’으로 그럴싸하게 포장했다는 지적(유경준 국민의힘 의원)이 나오는 이유다.
'근거'를 대체한 '무책임'
비록 시민대표단의 입장이 연금 개혁 내용을 최종적으로 못 박는 것은 아니라지만, 현재 세대와 미래 세대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행동에 소수점 단위 숫자, 50년 뒤의 추정치를 놓고 치열하게 논쟁을 벌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은 심각하게 되돌아봐야 한다. 데이터와 통계, 그리고 정교한 추계가 있어야 할 자리에 비전문가들의 ‘그까짓 거 대충’이라는 무책임이 자리 잡은 것은 기가 막힐 일이 아닐 수 없다.

쌀 한 톨이 팽팽한 저울의 균형을 깨뜨리고, 조그만 불량 부품 하나가 우주왕복선을 화염에 휩싸이게 한다. 가장 중요한 ‘숫자’가 빠진 채 진행되는 연금 개혁을 과연 안전하고 믿을 만하다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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