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시대에 질서를 만드는 예술가.’
영국의 영화감독이자 예술가 존 아캄프라(66)에 대해 세계 미술계가 보내는 찬사다. 그는 20대였던 1982년 런던에서 이민자 예술가 단체 ‘블랙 오디오 필름 콜렉티브(BLFC)’를 설립해 지금까지 흑인 영상 예술을 개척했다.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와 뉴욕대, 프린스턴대 등에서 강단에 섰고 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지난해 영국 왕실의 기사 작위를 받았다.
그는 올해 제60회 베네치아 비엔날레 영국관 공식 작가로 선정돼 ‘밤새 빗소리를 듣다(Listening All Night to the Rain)’라는 제목으로 회고전 형식의 대규모 전시를 열고 있다. 이번 전시가 특별한 건 두 가지 측면에서다. 그동안 흑인 이민자들의 정체성과 제국주의, 영국 내 인종 문제, 환경과 노예제도 등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작업해온 그를 1990년 후반부터 이미 베를린과 칸 등 세계적인 영화제에서 주목했다. 정작 영국 미술계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번 전시엔 영국을 대표하는 최대 미술 투자사인 아트펀드와 버버리, 포드재단, 블룸버그자선재단, 프리즈 아트페어 등이 후원사로 나섰다. 영국 정부가 반세기 만에 그를 ‘국가대표 예술가’로 인정한 것이니 평생 영국의 이방인으로 살았던 그에게는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역대 가장 많은 스크린이 이번 전시에 등장한다. LG전자는 그의 예술세계를 압축한 이번 전시에 공식 후원사로 참여해 최고 사양의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스크린 60여 대를 작가에게 제공, 그의 과거 어떤 전시보다 뛰어난 화질로 구현할 수 있게 도왔다.
1958년 가나에서 태어난 그는 포스트 식민주의 시대의 풍파를 그대로 맞았다. 1966년부터 다섯 차례 연달아 벌어진 쿠데타 과정에서 아버지가 사망했고, 어머니의 안전마저 위협받았다. 아캄프라 감독의 할아버지는 가나에서 존경받던 아캄프라 가문의 대제사장. 큰손자였던 아캄프라는 어머니와 함께 작은 배를 타고 목숨을 건 탈출을 해야 했고, 할아버지는 ‘삶의 혼란에 질서를 가져오던, 대제사장의 힘을 상징하는 가문의 반지’를 손자에게 전하는 대신 입에 넣고 삼켜버렸다. 어린 소년은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고 영국 땅에 도달해 성인이 된 이후 그만의 방식으로 질서를 찾는 일을 계속했다. 그에게 영상 작업이란 그렇게 가문의 유산과 인류의 미래를 지키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지난달 17일 이탈리아 베네치아 비엔날레 개막을 앞두고 한 행사장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한국에서 왔다는 필자에게 “한국은 이제 모두 나의 친구다. 독보적인 LG전자의 영상 기술로 약 1년간 협업의 결과가 매우 놀랍고 경이로웠고, 그렇게 내 작품에도 새로운 장이 열린 것”이라고 했다.
▷‘밤새 빗소리를 듣다’라는 제목이 시적입니다. 방글라데시 대홍수, 배 타고 떠나는 이주 노동자의 뒷모습 등이 특히 인상적인데요.
“전시 제목은 북송의 시인 소동파(1027~1101)의 시구에서 따왔습니다. 죽기 직전까지 유배를 다닌 소동파의 말년처럼 빗물과 빗소리에서 착안한 영상들은 아마 현대 사회의 떠돌이와 다르지 않을 테니까요. 식민주의, 토양 오염으로 인한 이슈들, 해양 생태계 위험 등의 주제를 다룹니다. 모두 서로 연결돼 있습니다.”
▷‘행동하는 것’에 대해 강조해왔습니다. 어떻게 작품으로 구현하는 것인가요.
“제 모든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소리’입니다. 소리를 어떻게 듣고,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에 대해 공간 구성을 예민하게 하죠. 그것은 곧 작품과 관객 사이의 능동적인 관계를 형성합니다. 영상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고, 보는 이들이 직접 그 의미를 찾고 발견해야 하는데, 그런 여정에서 보는 행위뿐 아니라 듣는 것도 큰 부분입니다.”
▷이번 비엔날레 주제가 ‘외국인은 어디에나’입니다. 이민자 이슈를 40년 넘게 다뤘는데, 과거의 일이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세상이지요.
“처음 이민자 이슈를 다뤘을 땐 좀 더 복합적 상황이었습니다. 그때의 이민자는 부모님 세대, 즉 1950~1960년대에 비행기와 배를 타고 입국하던 시절의 이야기였죠. 현재는 사람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필사적인 상황에 놓이는 경우가 더 많아졌습니다. 표면적으로 그때가 더 심각해 보일 수 있지만, 현시대의 이주민 문제가 더 극심하다고 생각합니다.”
▷가나를 탈출할 때 여덟 살이었습니다. 어떤 기억이 남아있나요.
“그저 그곳에서 절박하게 빠져나오려던 감정만 기억납니다. 고작 7~8세였기 때문에 당시 상황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없었죠. 그렇지만 어떤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두려움만은 또렷이 느끼고 있었습니다. 유럽에 도착했을 때 눈이 매우 많이 왔던 것이 기억나요. 잠깐은 굉장히 즐거웠지만 동시에 조금은 어색하고 불편한 기분이었어요. 아마 처음 느끼는 추위, 처음 본 눈이라 그랬을까요.”
▷당신이 다루는 문제는 모두 ‘인간이 만들어낸 문제’입니다.
“40년 넘게 영상을 제작하며 배운 점은 현존하는 아주 많은 것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그렇기에 그것들은 만들어지지 않을(unmade)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나 사회가 만드는 모든 것은 어쩌면 만들어지지 않을 수 있는 것이죠. 제가 긍정적으로 보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앞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증거죠.”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이 많은데, 왜 영상을 택했습니까.
“영상 안에 모든 장르를 담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만드는 대부분의 영상에서 저는 칠을 하기도 하고 조각적 형태를 만들기도 하고, 디자인이나 사진, 음악이나 문학적인 요소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모든 장르를 아우르는 ‘할아버지 같은 장르’가 영상이라 좋아합니다(웃음).”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죠. 영화감독 외에 요즘 영감을 주는 다른 예술 장르나 예술가가 있다면요?
“네덜란드 르네상스 아티스트인 한스 홀바인의 드로잉은 이번 전시에서도 그 영향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흐르는 물속에 르네상스 명화를 태블릿에 재생시켜 담가 놨다). 만약 저처럼 많은 영상물을 봐야 하는 상황이라면 너무 많은 잔상이 남는다는 것이 문제예요. 우리는 흥미로운 것을 만들어내기 위해 오히려 ‘잊어야 할’ 때가 있죠. 난 너무 많은 필름을 봐왔어요, 그게 제 문제라면 문제죠(웃음).”
▷LG OLED로 작업한 과정을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
“영국관에는 여러개의 방이 있는데, 공간마다 여러 개의 스크린이 설치돼 있습니다. 이 구조에서 가장 중요한 건 그 스크린들이 서로와 소통하면서도 서로를 방해해선 안 된다는 점이었죠. 일반적인 프로젝션(영사 기법)과는 다른 방식으로 디스플레이들이 서로 작용하는 이번 설치는 선명한 색상의 표현이 중요했어요. 모든 것이 관계를 이루면서도 서로 방해하지 않는, 서로 친밀하면서도 명확한 공간을 만들기를 원했습니다. 작은 공간 안에서 여러 개의 그리드를 설치하는 것이 쉽지 않기에, 이를 가능하게 하는 LG OLED가 정말 중요했죠. 60개 이상의 TV를 통해 작업한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제가 바라던 걸 온전히 다 담아낼 수 있었습니다. 색과 빛을 완벽하게 컨트롤할 수 있는 것은 처음이었고, 경이로운 수준이었습니다.”
▷어떤 예술가로 기억되고 싶나요. 역사가, 영화감독, 사회고발자, 기록자 중 택하라면?
“그것들 모두요(웃음).”
베네치아=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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