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매달린 성조기. 백악관의 입구가 침몰한다. 검은 흙으로 지어진 파사드(건물 앞 면)는 그 자체만으로도 위태로운데, 심지어 기울어져 있다.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은 모습. 트랜스젠더 활동가인 마샤 존슨의 조각상은 침몰하는 백악관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다. ‘미국이 망한다(망하고 있다)’는 간단한 명제가 마치 허드슨 강바람에 흔들리는 깃발이 내는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퍼진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가, 아니면 정말 모르는가”라고. ‘실제보다 더 나은 것(Even Better Than the Real Thing)’은 과연 진짜 나은 것일까, 아니면 더 악랄한 거짓말일까. 제81회 휘트니비엔날레가 던진 물음이다.
올해 휘트니비엔날레는 미술관 큐레이터인 크리시 일스와 멕 온리가 디렉터를 맡았다. 주제인 ‘실제보다 더 나은’은 ‘현존’이라는 개념을 고민한다. 일상을 파고든 인공지능, 낙태 문제로 대표되는 개인과 사회의 신체 주도권 다툼, 늘 반쯤 온라인에 접속된 상황에서 발생하는 유동적 정체성, 21세기에도 이어지는 영토 전쟁과 환경 문제까지 ‘변곡점’에 달한 우리의 현재를 예술가 71명이 돌아보는 기획이다.
이번 비엔날레의 준비 기간이었던 지난 2년간 미국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첫 손에 꼽히는 건 낙태권 이슈다. 1973년 미국 대법원에서 여성의 신체 주도권을 인정하는 ‘로 대 웨이드’(Roe vs Wade) 판결이 뒤집힌 것. 낙태권 보장이 사생활 권리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게 골자다. 세대별로, 주별로 찬반 양론이 불붙은 가운데 일부 주에서는 낙태를 인정하지 않아 생명이 위험한 상황에 처해 꼭 해야 하는 여성들마저도 수술을 위해 주를 건너 이동하는 황당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이번 대선에서도 주요 이슈인데, 프로 라이프(pro life·낙태 반대)인 공화당과 프로 초이스(pro choice·여성의 선택권 존중)인 민주당으로 나뉘며 세대 간 이슈로 비화하기도 했다.
카르멘 위넌트는 이 이슈에 대해 조용하고 담담한 분노를 표출한다. 벽 전체를 낙태 클리닉 의사와 자원봉사자의 사진 2500여 장으로 채운 것.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여성들의 수많은 사연을 구구절절 늘어놓는 대신, 현장에서 촬영한 ‘현재’를 가져와 관객에게 펼쳐 놓는다. 빈칸을 짐작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현재 미국에서 가장 심각하게 다뤄지는 이슈는 ‘이민’이다. 미국은 이민자들이 세운 나라이지만 이곳에 ‘난민’ 이슈와 저렴한 노동력을 원하는 경제적 수요가 맞물리며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는 양상이다. 에디 로돌포 아파라시오는 거대한 호박(나무 진액) 조각상을 선보였다. 1950년대와 1960년대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많이 심은 나무에서 채취한 것인데, 도시 조경수로 많이 쓰인 나무다. 나무가 점점 자라 보도를 침해하자 로스앤젤레스시는 나무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작가는 필요하다고 마구잡이로 심었다가 힘없이 뽑혀 나간 나무를 ‘노동 이민자’에 비유한다. 1950년대 이후 미국에 일하러 온 수많은 남미 출신 노동자들이 그 쓰임을 다하자 추방당했던 아이젠하워 시대의 이민 정책. 호박 안에는 도시에서 흔히 보이는 일상적 물건 외에도 엘살바도르 군부 대량 학살과 관련한 문서가 숨어 있다. 호박은 아직 완벽하게 굳은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 그 모양이 틀어진다. 작가는 기억과 트라우마가 신체에 흔적을 남기고, 시간이 지나며 변화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올해 주제인 ‘실제보다 더 나은’은 현실 그 자체에 더 집중한다. 멕 온리 큐레이터는 도록에 “이번 비엔날레를 기획하며 1990년대 문화전쟁만큼이나 첨예한 정치적 순간들을 고려해야 했다”고 썼다. 흑백이 아닌 흑백 사이의 다양한 회색이 존재하고, 심지어 거기에 포함되지 않은 색도 있다는 뜻이다. 현지 언론에서 이번 비엔날레를 ‘불협화음의 집합’이라고 평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난 3월 20일 개막해 오는 8월 11일까지 열리는 휘트니비엔날레는 올해로 81회를 맞았다. 1932년 시작해 미국에서 가장 오래된 현대미술제로, 뉴욕 휘트니미술관에서 격년으로 열린다. 한국과의 인연도 빼놓을 수 없다. 휘트니비엔날레가 미국을 벗어나 유일하게 열린 곳이 1993년 경기 과천. 배경에는 고(故) 백남준이 있었다. 당시 휘트니미술관은 첫 해외 전시로 일본을 점찍었는데, 백남준은 당시 “주제인 ‘경계선’에 더 적합한 곳이 한국, 서울”이라며 밀어붙였다. 결국 비엔날레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으로 왔다. 92년의 역사상 단 한 번뿐인 외유였다.
휘트니미술관은 그 시작부터 실험적인 동시대 예술을 받아들이고 키우는 플랫폼이었다. 지금은 구겐하임, 뉴욕현대미술관(MoMA), 메트로폴리탄박물관과 함께 뉴욕의 4대 미술관으로 통하지만, 1931년 설립 당시엔 미술관을 세우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철도왕이던 코닐리어스 밴더빌트의 손녀이자 미술가였던 거트루드 밴더빌트 휘트니는 자신이 수집한 미술품 700여 점을 기증하려 했으나 ‘검증되지 않은 젊은 미술가의 작품들’이라는 이유로 여러 곳에서 거절당했고, 미술관을 새로 지었다. 휘트니비엔날레에는 백남준을 비롯해 제니 홀저, 에드워드 호퍼, 로이 리히텐슈타인, 신디 셔먼 등 3600여 명의 작가가 거쳐갔다.
올해는 현대자동차가 휘트니미술관과 10년 장기 후원 협약을 체결한 그 첫해여서 더 의미 있다. ‘휴머니티를 향한 진보’라는 비전을 내세우고 있는 현대차는 공식 후원사로 앞으로 다섯 번의 휘트니비엔날레를 함께한다. 비엔날레 개막에 맞춰 건축가 렌조 피아노가 설계한 미술관 5층 야외 테라스 대형 전시장에서 ‘현대 테라스 커미션’으로 조각, 퍼포먼스 멀티미디어 작품을 선보인다. 첫 작품은 뉴욕 기반의 시카고 출생 작가 토크와세 다이슨의 ‘Liquid Shadows, Solid Dreams’. 움직임을 통해 자유를 발견할 수 있는 공간 설치 작품으로 관객들이 작품을 만지고 경험할 수 있도록 했다. 정의선 현대차 회장은 “현대차는 예술적 실험을 지속해 온 휘트니미술관과의 장기 파트너십으로 예술가들이 제시하는 우리 사회의 다양성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지속 가능한 미래를 만드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고 했다.
뉴욕=이한빛 미술 칼럼니스트/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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