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야당이 단독 처리하고, 윤석열 대통령이 거부권(재의요구권)을 행사했던 '이태원 특별법'이 여야 합의를 거쳐 지난 2일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태원 특별법은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에서 발생한 159명의 압사 사고와 관련한 피해자 권리보장과 진상 규명을 위한 특별 법안이다.
'이태원 특별법'은 지난한 줄다리기 끝에 여야가 한 발씩 물러서면서 합의를 이뤘다. 이태원 사고 관련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하는 것이 핵심인데, 특조위의 구성과 활동 기간, 조사 방식 등에서 여당이 '독소 조항'이라고 지적했던 요소들이 대폭 수정됐다.
그러나 이번에는 의장 1인을 여야가 협의해 정하고, 여야 각 4명을 추천해 총 9인으로 구성되도록 했다. 국민의힘이 반대한 '유가족 등 관련 단체가 추천하는 3인'은 특조위에서 빠졌다.
지난 민주당 주도 법안에서 특히 '독소 조항'으로 지적됐던 △특조위의 영장청구 의뢰 권한이 담긴 30조 △특조위 직권으로 진상규명 조사를 수행하거나 불송치 및 수사 중지된 사건에 대한 자료 제출 명령 권한이 있는 28조는 삭제됐다. '영장청구 의뢰권'은 진상 규명을 위한 자료 제출 요구를 2회 이상 거부할 경우 영장 청구를 의뢰하도록 한 것이고, '직권조사 권한'은 조사와 재판 기록 등의 제출 요구 등을 통해 조사가 가능하게 한 것이었다.
민주당이 국민의힘의 주장을 받아들인 데는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양자 회담이 힘을 미쳤기 때문으로 보인다. 윤 대통령은 회담 당시 이 대표에게 "특조위의 영장청구권 문제가 해소되면 법안을 무조건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언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활동 기간에 대해선 민주당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1년 이내로 하되 3개월 이내에서 연장할 수 있도록 했다.
피해자 지원을 위한 각종 지원 방안, 추모 공원 설립 등의 내용은 민주당이 제안한 원안이 대부분 그대로 실렸다. 희생자를 위한 추모공원 조성, 추모 기념관 건립, 추모비 건립 등을 진행하도록 했고, 유가족 등 피해자에게 필요한 생활 여건을 마련할 수 있도록 생활비를 포함한 교육, 건강, 복지, 돌봄, 고용 등 피해자의 일상생활 전반을 종합적으로 지원하도록 했고, 피해자에게 생활지원금과 의료지원금도 지급할 수 있게 했다.
여야의 '합의 무드'는 법안 '제안 이유'에서부터 확연하게 드러난다. 책임 기관들이 제대로 예방 및 대처하지 못해 사고가 발생했고, 이에 대해 포괄적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등의 내용을 빼고, 사고 전반에 걸친 진상 규명 및 피해자 추모와 피해자들의 회복을 위해 법안을 발의하는 것으로 건조하게 기술됐다.
민주당이 주도로 발의한 '이태원 특별법' 제안 이유 "10·29 이태원 참사는 다중 인파가 밀집할 것이 예측되는 상황에서 재난관리 책임 기관들이 예방, 참사 대응 및 수습 등 전방위적 관리 및 대처를 하지 못해 발생한 사회적 재난이고, 참사 이후에도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부적절하거나 부실한 조처의 문제가 제기됐다. 그러나 현재까지 재난관리 책임 기관들 전반에 대한 포괄적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고, 적절한 조처를 받지 못한 유가족을 비롯한 피해자는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여야가 합의해 발의한 '이태원 특별법' 제안 이유 "2022년 10월 29일 발생한 10ㆍ29이태원참사의 발생 원인, 수습 과정, 후속 조치 등 참사 전반에 걸친 진사 규명과 책임을 밝히기 위해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하도록 하고, 10ㆍ29이태원참사 희생자들의 명예 회복과 지속적 추모를 위한 추모사업, 피해자들의 회복을 위한 간병비 및 심리지원 등 각종 지원 등을 실시하여 피해자들의 권리를 보장하고자 함."
다만 여야의 이러한 화해 무드는 오래 가진 못했다. 민주당이 이태원 특별법을 합의로 처리한 직후 '채상병 특검법'을 단독 처리하면서다. 김진표 국회의장은 야당의 요구대로 이날 본회의 안건으로 상정되지 않았던 채상병 특별법을 추가 상정했고, 민주당은 그대로 본회의를 통과시켰다.
국민의힘은 민주당의 '협치의 싹'을 입법 폭주로 꺾어버렸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정희용 국민의힘 수석대변인은 3일 논평에서 "민주당이 '이태원 특별법' 합의 하루 만에 채상병 특검법을 독단적으로 밀어붙였다"며 "합의를 강조하던 국회의장을 겁박하는 점령군 같은 행태는 민주당이 대한민국의 공당이 맞는지 의심케 했다"고 지적했다.
전주혜 국민의힘 원내대변인도 전날 논평을 통해 "김진표 국회의장은 어제 본회의에 당초 의사일정에도 없던 해병대원 특검법을 기습 상정했고, 민주당 의원들로부터 박수를 받았다"며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대표의 회동을 계기로 모처럼 여야가 이태원 특별법을 합의 처리하며 협치 분위기를 조성한 지 채 1시간도 되지 않아 벌어진 참극이었다"고 말했다.
반면 민주당 역시 "진실을 규명하는 것에 대해서 왜 이 정부·여당이 이처럼 인색한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반발했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3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이 참혹한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을 분명하게 해서 그 책임을 묻고, 동일한 사고가 발생하지 않도록 재발 방지 대책을 강구하는 것은 국민의 생명·안전을 지켜야 할 국가의 최소한의 책무인 것이 분명하다"며 "국가의 책임을 대신하는 대통령, 또 국가 권력을 행사하는 집권 여당, 이 점에 대해서 정말 왜 이런 태도를 취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쏘아붙였다.
이 대표는 "이태원 참사를 방치하는 것이 결국 오송 참사를 불렀다고 생각한다"며 "윤석열 대통령과 여당이 (채상병 특검법에 대해) 거부권 행사를 하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고 압박했다.
이슬기 한경닷컴 기자 seulke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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