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수 부진 고착화를 방지하고 차입 부문의 누적된 부담을 완화하기 위해 금리 정상화 필요성이 높아졌다”(모 금융통화위원). 지난 4월 12일 금융통화위원회 의사록의 일부다. 내수 부진 예측을 전제로 금리 인하 당위성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겨우 2주 만에 경기 상황이 급반전됐다.
4월 25일 발표된 올해 1분기 국내총생산(GDP) 증가율(1.3%)은 시장 전망치(0.6~0.7%)를 두 배 웃돌았다. “저희 예상보다 크게 차이가 났기에 어디서 차이가 났는지 검토 중이고, 겸허한 마음으로 살피겠다.” 한국은행 총재가 머리 숙인다. 예상 못 했음을 자인한 것이다.
정부는 ‘깜짝 성장’을 내심 반긴다. 1인당 25만원씩 민생회복지원금을 지급하자는 야당 주장을 치받는데 깜짝 성장 수치가 쓸모 있어 보인다. 경기 상황이 민생 회복을 걱정할 정도로 나쁘지 않음을 통계가 웅변하고 있어서다. 깜짝 ‘하락’이 아닌 게 천만다행이다. 예측 실패가 고맙기까지(?) 하다. 정치 공방에 경제예측 실패의 심각성은 뒷전으로 밀리는 분위기다.
예측 실패가 한은만의 문제는 아니다. 미국 중앙은행(Fed)의 신뢰도도 자주 시험대에 오른다. 3월 제롬 파월 Fed 의장 발언이 한 예다. “물가가 낮아질 것이라고 확신하는 데 더 오래 걸릴 수 있다.” 몇 주 전 “2024년 중 최소 3회 금리 인하에 대비하라”던 경고와 정반대다. 2022년 6월의 역대급 ‘9.1% 인플레이션’도 Fed 권위를 망가뜨린 대사건이다. Fed는 2021년 시작된 인플레이션을 ‘일시적(transitory)’ 현상으로 치부하다가 사태를 크게 키웠다.
어이없는 판단 배후에 예측모형이 있다. Fed는 나름 정교한 예측모형(‘FRB/US’)을 갖추고 있다. 경제 변수 500개에 방정식만 170여 개다. 막강한 모형이 졸지에 인플레이션 폭등도 예측하지 못한 구닥다리 신세로 전락했다.
영국중앙은행 사정도 매한가지다. “2022년 이후 물가를 너무 낮게 예측했다.” 작년 5월 영국중앙은행 수석이코노미스트가 하원 재정위원회에 불려 나가 실토한 고백이다. 배릿 볼드윈 하원 재정위원장은 영국중앙은행 전망 체계의 전면 개편을 강하게 요구했다. 영국중앙은행이 허겁지겁 다른 나라 전문가(벤 버냉키 전 Fed 의장)에게 개선 방안을 구걸(?)한 배경이다.
버냉키 보고서의 핵심은 경제분석모형 정비·강화다. 코로나 팬데믹,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탈(脫)세계화 급진전 상황을 예측모형이 적시에 반영하는 데는 어려움이 따른다. 그럼에도 버냉키 보고서는 돌발사태가 예측 실패의 면책 사유가 되면 안 된다고 본다. 예측모형의 범위 ‘밖’(outside the model)에서 갑자기 발생한 사건을 어떻게 담아낼지 고민하라고 주문한다. 앤드루 베일리 영국중앙은행 총재는 버냉키 보고서를 ‘한 세대 만에 얻은 기회(once-in-a-generation opportunity)’라며 애써 치켜세운다. 불편하지만 자존심을 내려놓고 고치겠다는 다짐이 묻어난다.
한은 1분기 GDP 속보치 발표 직후 공개된 ‘3월 중 산업활동동향’(통계청)은 혼란을 더 키웠다. 생산활동이 49개월 만에 최대 낙폭을 기록한 것이다. ‘깜짝 성장’ 스토리에 찬물을 끼얹는 통계다. 현재 국내 경기를 어떻게 판단해야 하나. 전문가들도 망연자실한 실정이다. “4월 통화정책 방향 회의 결과가 5월 회의의 근거가 되기 힘들어졌다.” 한은 총재가 통화정책의 ‘리셋’을 선언할 정도다.
전망 결과를 자주 발표한다고 더 친절한 중앙은행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예측력이 떨어지면 되레 혼란만 부추길 뿐이다. 포워드가이던스(한국형 점도표)도 마찬가지다. 3개월 시계에서 기준금리 흐름에 대한 금융통화위원들의 전망을 취합한 예상치다. 불과 2주 만에 예측 방향이 흔들리는데 ‘포워드가이던스’를 제시한들 시장참가자들이 믿어줄까. 중앙은행은 더 겸손해야 한다. 성찰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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