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먼 데서 온다. 천지간에 꽃을 뿌리며 봄은 온다. 햇빛이 도타워지며 꽃나무들은 기운생동해서 꽃봉오리를 터뜨리고 초목들은 연초록 새잎을 다투어 낸다. 기다리지 않아도 봄은 찾아와서 우리들 찢긴 가슴에 꽃을 문지른다.
땅속 구근에선 새싹이 올라오고 나뭇가지마다 꽃망울이 터지는 이맘때마다 비극과 참사를 낳은 날들이 우리를 맞았다. 지역마다 꽃 축제가 열릴 무렵 제주 4·3 사건, 4·16 세월호 참사, 4·19 학생 의거의 날이 돌아오며 죽음의 기억을 되살려냈다. 고열로 달군 오븐에서 팝콘이 튀겨지듯 벚나무 가지마다 벚꽃이 타닥타닥 피어나 천지를 밝히는데, 우리는 그날의 비통한 슬픔을 소환해야만 했다.
이 비극의 의례화가 응어리진 한을 다 씻길 수는 없다. 죽음의 주문에서 벗어나는 행운을 누린 자들이 추모제에서 얻어 오는 것은 ‘작지만 올바르고 정당한 일을 다 했어’라는 자기만족과 한 줌의 도덕적 면죄부다.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비극을 소비하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일상으로 돌아간다. 누군가는 새로운 연인을 만나고, 누군가는 금과 쾌락을 탐하는 작은 삶을 꾸릴 테다.
봄은 종알종알 꽃을 뿌리며 돌아온다. 분명한 것은 봄이 그것만으로 충분치 않다는 점이다. 미국 여성 시인 빈센트 밀레이가 쓴 ‘봄’의 첫 구절 “4월아, 너는 무엇 때문에 다시 돌아오는가?/ 아름다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읽을 때마다 무릎을 치며 공감한다. 오늘은 노란 개나리꽃이 핀 길로 노란색 원복을 입은 한 떼의 유치원생들이 재잘거리며 지나가는 광경을 봤다. 저 천진하고 어여쁜 생명들은 인생의 슬픔이나 비극을 알지 못한 채 살아서 까르륵거린다. 봄은 환희의 외침이나 희망을 노래할 의무를 안긴다.
우연히 TV에서 방영하는 세월호 참사 다큐멘터리를 본다. 배가 침몰하는데 밖으로 나오지 않고 배 안에 머무르라고 안내방송을 한 선장과 선원들은 배에서 탈출한다. 그 때문에 수학여행에 나섰던 어린 학생들은 떼죽음을 당했다. 죽은 아이들의 억울한 원혼은 지금도 이승을 떠돌 것만 같다. 어느 대목에서 잊힌 슬픔이 돌아오고 누선에 눈물이 차올라 흘러내린다. 봄의 빛과 아름다움 속에서 움트는 초록 잎들! 봄의 화사함 뒤에 이토록 비통한 죽음의 기억들이 숨어있는 것을!
그래서 봄이면 심장이 아프고 온몸이 욱신거렸던 걸까? 봄이면 나 혼자 외롭고 슬펐다. 내가 웃는 동안 벗들이 나를 감싸고 즐거워했다. 하지만 내가 온 세상을 빼앗긴 듯 슬픔에 잠길 동안 내 곁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 홀로 깨어 탄식하던 밤들은 길고 괴로웠다. 봄은 저편에서 만화방창으로 흐드러져 피안인 듯 빛나고, 밤의 고독은 어쩌자고 자수정처럼 홀로 빛나는가! 나는 위안을 얻으려고 엘라 윌러 윌콕스의 ‘고독’이란 시를 찾아 읽었다. 단호하게 시작하는 첫 구절이 아름다운 시다. “웃어라, 그러면 세상이 너와 함께 웃으리라/ 울어라, 그러면 너 혼자 울게 되리라.” 어떻게 하면 웃을 때 세상이 나와 함께 웃듯이, 울 때 세상이 나와 함께 울어주며 슬픔을 달래줄까?
이미 낮엔 봄이 끝나고 여름이 찾아온 듯 타오르는 한낮 열기로 이마가 불에 덴 듯 뜨겁다. 이 열기는 여름 내내 우리 정수리에 퍼부어질 테다. 수박과 복숭아는 무르익고, 우리는 봄의 비극을 잊은 채 기도도 눈물도 없이 보내며 여름에 열중할 테다. 여름비가 쏟아지면 어딘가 숨어있던 맹꽁이들이 기어나와 밤새 울어댄다. 비 그친 뒤 우리의 어린것을 품에 안고 ‘아가야, 울지 마라, 저건 맹꽁이 울음이란다’ 하며 다독일 때 여름밤의 허공에서는 반딧불이가 군무를 추고, 초록 밤하늘에는 별들이 나타나 영롱한 빛을 뿌린다. 이 세상의 모든 기쁨이 우리를 비켜 가더라도 저 여름밤의 감미로운 행복을 잊을 수는 없으리라. 우리가 탕약처럼 쓰디쓴 인생의 슬픔과 아픔을 삼키며 늙어갈 때 세월은 흐르고 어린 자식들은 자라서 뿔뿔이 흩어지겠지.
청춘의 한때가 그랬듯 지난봄도 찬란하게 빛났으니, 꽃지는 아침엔 울고 싶었다. 저기 달아나는 봄을 전송하자. 살아보니, 기쁜 날보다는 슬픈 날이 더 많았다. 온갖 꽃과 함께 봄이 올 때마다 슬픔을 무찌르고 씩씩하게 살고 싶은 것은 쑥쑥 커가는 어린 자식들과 반려동물이 곁에 있고, 아름다운 날들이 올 거라는 기대를 놓지 않았던 까닭이다.
부모님 기일처럼 봄이 슬픈 기억을 안고 돌아오더라도, 봄이 돌아올 때마다 심장이 찔린 듯 아프고 온몸이 욱신거리더라도 살아봐야 한다. 지어미는 지아비의 이마에 손을 얹고, 지아비는 지어미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살아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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